자연 이야기

| my story 2008.03.21 12:05
 

자연 이야기


예전에는 자주 산책을 갔다. 드넓은 들길을 온종일 걸을 때도 좋았지만, 그냥 아무 곳에나 쪼그리고 앉아 시선가는대로 한 평 남짓한 풀밭만 하염없이 바라보아도 자연의 완벽한 질서를 만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그 작은 땅 안에 자라난 온갖 잡풀과 들꽃들의 무질서가 연출해내는 완전한 조화는 그 어떤 미학적 찬사를 끌어다 붙여도 설명이 역부족이다.

어디 눈에 보이는 이미지뿐인가! 가만히 눈 감으면 또 다른 완벽한 소리의 세계가 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결 가는대로 나뭇잎들 몸 부비는 소리, 들짐승 바스락거리는 그 온갖 잡음들 또한 이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도 깊은 화음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자연은 있는 그대로 버려두고 던져놓아야 비로소 가장 강렬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차도 없고 화질 낮은 아날로그 카메라 한 대 조차 없던 시절, 나는 무수히 걷다가 앉거나 혹은 누워서 자연의 거대한 축제를 온 몸의 세포에 저장시키느라 안간힘을 다했다.

자칫 잡념에 휩쓸려 눈길을 놓아버리면 마치 전광석화처럼 수면 위로 솟구치는 은어의 비늘 같은 아름다움도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고, 잠시만 귀를 닫아도 자연의 내밀한 감동이 아득하게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더욱 내 마음 밑바닥이 보이는 데 까지 걸어 내려가려고 집중해야 했다. 지금도 추억하면 진실을 담아낸 기억이란 떠올리는 그 순간 언제나 생생한 현재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차와 카메라를 소유하게 되어 이미지를 쫒는 여행의 반경이 넓어지자 상황도 급변했다. 자연은 더 이상 느림을 거느린 사유의 정원이 아니라 갈수록 가속도가 붙은 이미지 포획의 대상물로 전락해갔다. 자연과의 동행관계는 이미 지난날의 일이 되어버렸고, 이젠 그 사이를 오만하게 질주하다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만 경쾌한 샷으로 낚아채  디지털 메모리에 입력한다.

관조의 침전물이 사라진 여행의 끝 기억은 허겁지겁 돌아다닌 노동의 피로로 채워지고, 작업실 컴퓨터에 재생된 이미지는 너무나 생경스러운 표피적 아름다움의 파노라마일 뿐이다. 마음으로 보던 것은 좁지만 깊었는데 반해 기계의 힘을 빌린 것은 분명 감각영역의 확장에 크게 기여했지만 그 감흥이 얕아진 까닭이다.

자연은 마음을 송두리째 주지 않으면 절대 먼저 다가오지 않으며, 내가 편하게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만큼 잃을 것도 각오해야 한다는 교훈을 그래서 요사이 더욱 실감하고 있다.


이영철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