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 31
이영철 화가의 김천 직지사
미술학도의 꿈과 청년기의 아픔을 함께한 곳 

김천시 봉산면 신암1리 고향마을과 지척에 위치한 직지사. 유년시절 소풍의 추억이 깃든 곳, 휴일이면 으레 화구를 메고 찾던 곳이다. 그때 고색창연한 집과 아름드리 나무들을 정신없이 화폭에 옮기던 일은 너무나 행복한 추억이다. 경내에 내린 흰눈, 그때가 시리도록 그립다.



어머니를 비롯해 모든 가족들이 다녔던 봉산면 신암1리 신암초교. 학생이 줄어들자 1999년 끝내 폐교됐다.


 
동네 놀이터로 애용돼 어릴 적 추억을 간직한 신암1리 고향마을 왕버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김천시 봉산면 신암1리 167번지다.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김천시는 경상북도 서북부 지역 경부 상행선 마지막 도시로 황악산, 수도산, 대덕산의 삼산(三山), 감천, 직지천의 이수(二水)의 고장이자 동쪽은 칠곡군, 성주군과 서쪽으로는 충북 영동군, 전북 무주군과 마주하고, 남쪽은 경남 거창군을, 북쪽으로는 상주시 및 구미시와 연결되어 있는 국토의 중심지역으로 교통과 교육의 도시이기도 하다. 특산물로는 포도와 과하주(過夏酒)가 있으며 빗내농악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유소년기를 보낸 고향은 경부고속도로 김천나들목에서 우회전해 4번 국도를 따라 직지천을 끼고 서북진해야 한다. 승용차로 5분 거리에 2011년 김천시가 세운 ‘영남 제일문’이 나오는데, 추풍령을 넘어 첫 영남 땅이자 현대 교통의 요충지라는 상징성을 담아 과거 한양을 오가던 지름길에 세운 것이다. 영남 제일문을 지나면 이내 현대 시조의 선구자이자 ‘조국’으로 유명한 백수(白水) 정완영 선생의 고향 봉계리 안내판이 보이고, 이곳을 지나 2㎞ 정도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 좌측은 황악산 아래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자 국내 25본산 가운데 하나인 직지사로 가는 입구다. 그리고 우측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봉산면 태평리가 나온다. 바로 시단과 대중의 사랑을 함께 받고 있는 시인 문태준의 고향이고, 이곳에서 긴 호흡으로 산모퉁이 하나만 돌아가면 80여 호의 전형적인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1943년 개교해 1999년 폐교된 신암초등학교 건물이 먼저 보이는 바로 나의 고향인 봉산면 신암1리가 나온다.

 고향마을을 지나면 경북 서북부의 끝이자 국내에서 유일하게 해안과 접하지 않은 충청북도의 시작이며, 소백산맥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관문인 추풍령(秋風嶺)이다. 내 고향은 추풍령과 황악산 사이에 내려앉은 야산과 실개천을 끼고 있다. 지금은 김천 포도 생산지의 하나로 유명하지만 유년기를 보낸 1960년대는 다랑이식 논농사와 밀, 보리, 조, 수수 등 밭농사가 전부였던 빈곤한 산골이었다. 비포장길을 털털거리며 달리던 시외버스는 하루에도 손꼽을 정도였고, 전기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인 1970년대 중반에 들어왔을 정도로 그야말로 첩첩산중 오지마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지독한 가난과 호롱불 아래 놓인 열악한 환경은 자연과의 직접적인 교감과 소통의 길을 열어주었다. 뽀얀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끝없이 서 있던 미루나무, 한여름 밤하늘 가득 손에 잡힐 듯 내려온 별빛을 그을리던 모깃불, 봄비 내리는 들판을 맨발로 뛰어다니며 만난 젖은 풀잎의 촉감, 소나무 장작 군불 속에 익어가던 고구마, 실개천에서 함께 헤엄치던 수많은 민물고기들…. 자연의 생활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형성된 감성들은 내가 평생을 통해 퍼 올릴 수 있는 마르지 않은 창작의 샘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미지에 유독 민감했던 탓에 그 시절 나의 놀이는 꽃들과 새, 풀들이 자란 오솔길을 지나 숲과 들판을 종일 헤매는 일에 바쳐졌다. 당시 우리 집 뒤란에는 아주 큰 살구나무 한 그루가 거의 지붕을 덮다시피 서 있었다. 봄이면 온 집안과 밖을 꽃 잔치로 넘치게 해주었는데, 우리 집 삼형제는 날마다 살구나무에 올라 꽃가지를 흔들며 꽃비를 내리곤 했기 때문이다.

 나의 그림 그리기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받아든 교과서 삽화에 매혹되면서 시작되었다. 투명한 수채화로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들은 내 가슴을 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소풍은 주로 봉계 재실 아니면 직지사로 왕복 한나절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 물론 그곳에서 만난 고색창연하고 거대한 집들과 나무를 정신없이 화폭에 옮기던 일은 너무나 행복한 추억이다. 그러나 가난한 집 가장으로 자라 철도 공무원으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시던 아버지는, 그토록 기대하던 공부가 아니라 고생길이 훤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둘째 아들의 생각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비호 아래 한일중학교, 성의상업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미술부 활동을 했다. 특히 일요일이면 고물자전거에 화구를 싣고 직지사 경내와 계곡에 들어앉아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아버지와의 갈등이 고조되고 가출과 방황 끝에 대구로 내려온 후부터는 일 년에 한 번 명절 때 겨우 집에 얼굴을 내밀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화해의 길을 모색했지만 대화가 단절되니 특별한 계기가 필요했다. 스물다섯 늦은 나이에 미루던 대학진학을 결심한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그러나 대학시험을 치르던 바로 그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렵게 시험을 치고 저녁에 작업실 쪽방으로 돌아와 전보 쪽지를 보고 대구에서 김천으로 왔다. 막차가 끊긴 9㎞ 가까운 밤길을 걷고 뛰며 새벽이 가까운 시간 동네가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멀리서도 우리 집만 불이 환했다. 누가 짙은 어둠을 밝히는 불빛을 희망이라 했던가. 그날 밤 어둠 속에서 본 우리 집 환한 불빛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방금 베인 상처처럼 절망과 아픔, 그리고 슬픔으로 되살아난다.

 그 무렵 우리 마을도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개천이 오염되고 도로는 포장되는 등 내 고향은 정신적, 물리적으로 모두 마음 깊은 곳 기억창고로 숨어버리고 어둡고 우울한 곳으로 떠내려갔다. 그러나 직지사와의 인연은 아버지에 대한 죄송함과 그리움으로 인해 오히려 계속되었다. 아름다움을 스케치하던 그곳은 그 후 고향을 찾을 때마다 들러 삶과 죽음, 윤회와 존재에 대한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 명상은 작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붉은 바탕에 고뇌하는 스님을 그린 ‘염원’은 1999년 신라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아 대학을 갓 졸업한 화가의 선명한 출발이 되었다.

 화가로 활동하며 어느덧 중년이 되다 보니 그동안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이별하는 것에 대한 슬픔과 원망의 감정은 그리움과 아쉬움을 넘어 지키고 되살려야 할 가치가 되었다. 생태와 환경에 대한 보호와 함께 인간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동화 같은 유년의 시간들, 사랑과 우정을 나누던 순수했던 감성들을 되찾는 작업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렇게 인생에 대한 긍정, 기쁨과 아픔이 하나로 화해하는 시간을 건너고 보니 내 고향도 다시 빛나던 시절로 되돌아왔다.

 이제 곧 봄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온 산천에 봄꽃이 만발하겠다. 내가 살던 고향 집을 가득 채우던 살구나무를 생각하면 늘 백수(白水) 선생님의 ‘분이네 살구나무’가 뒤따라온다.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앞으로 나는 계속 봄을 그리고 싶다. 그린 꽃은 시들지 않고, 그린 봄날도 떠나지 않으니까. 내 고향의 추억과 분이네 살구나무를 그리고, 직지사에 만개한 정신의 꽃도 그리고 싶다. 그래서 간혹 지난날 나처럼 고향과 희망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 가슴속에 여전히 잠자고 있을 봄을 일깨워 주었으면 좋겠다. 유년기 빛나던 자연의 감성을 전해준 고향, 청년 시절 이별과 슬픔으로 황폐한 쓸쓸함을 남긴 고향, 그리고 이제 인간이라는 숙명적인 서러움 아래 고인 존재에 대한 긍정과 사랑까지 비비고 섞어 넣어서 영원히 피어 있는 나의 살던 고향을 그리고 싶다.  




매일신문 공식트위터 @dgtwt / 온라인 기사 문의 maeil01@msnet.co.kr
사진 /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2012년 2월 4일(토)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8234&yy=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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