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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이 안심이

 

남문 재래시장 상가 이층 남향, 열 댓 평 화실에 둥지를 튼 지도 삼년이 지나간다. 처음 이곳 215호에 짐을 풀자마자 받은 혜택은 창을 통해 밀려드는 엄청난 양의 햇살이었다. 그동안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워 지하실 아니면 북향의 공간 속에서 주로 지내오던 터라, 작업실이 환한 것이 한동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정도 공간에 적응하고 난 후부터는 창 밖 시장으로부터 소리와 향기가 하나 둘씩 찾아왔다. 단골손님과 덕담하는 상인들, 떡방아 기계음, 참기름가게 구수한 내음, 비와 바람이 드나드는 소리까지 홀로 작업실을 머무는 시간을 외롭지 않게 했다. 길고양이 의심이는 내가 작업실에서 만난 수많은 빛깔의 시간, 제일 마지막에 찾아왔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아주 튼튼하게 지어진 상가는 창 밖에도 제법 넓은 면적의 여유 공간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곳이 길고양이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였다. 다만 워낙 경계심이 많은 습성 때문에 오랫동안 녀석들이 다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다.

 

이년 전 어느 가을, 밤늦게 작업을 하다 얼핏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고양이가 한 마리를 보았다. 그날따라 녀석은 배가 많이 고팠던지 경계심이 가득한 눈초리를 하고서도 달아나지는 않았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기 전 아내를 따라 동네 길고양이 밥도 주고 정도 들어본 경험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먹다 남은 작은 참치 통조림을 창 가로 내밀었다. 여전히 잔뜩 의심에 찬 눈을 거두지 않던 고양이는 번개같이 참치 캔을 통째로 물고 달아났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다음날부터 비닐봉지에 사료를 섞어 창 밖에 내놓고 문을 살짝 닫아주면 조심스레 다가온 고양이가 허겁지겁 사료를 삼키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겨울바람이 드세던 시기에는 위기도 있었다. 먹이를 다 비운 빈 봉지는 아랫집 가게 지붕으로 떨어져 쌓이다가 하나 둘씩 가게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가게 주인아저씨는 몹시 화가 나서 215호를 습격하셨고, 나는 사과와 변명을 반복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세운 대책이 가락우동을 담는데 쓰이는 작은 양은 냄비였다. 냄비 손잡이에 끈을 묶고, 반대편은 창가에 둔 의지 다리에 단단히 고정한 후 사료를 담아 내어놓던 날, 길냥이는 이제야 내 밥그릇이 생겼네! 하듯 냐옹, 냐옹 반응을 보였다. 늘 소리 없이 다가와 내어준 먹이만 해치우고 미련 없이 사라지던 녀석이 갑자기 소리를 내자 이상하게 기뻤다. 그동안은 의심 많고 민첩하기는 해도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아서 내심 벙어리인가..걱정을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날 이후 의심이와 꽤 친해진 것이라고 착각을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페트병에 구멍을 뚫어 역시 끈을 달아둔 물통에 물을 채워주려고 무심코 손을 내밀다가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고 사정없이 할퀴는 바람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사실 긁혀 피가 흐르는 팔의 아픔보다는 나 홀로 쌓았다고 오해한 신뢰에 대한 배신감이 더욱 컸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아무리 의심이 많다 해도 먹이를 챙겨주는 아군도 구별 못하는 못된 놈이라고 욕도 했다. 의심이는 좀 미안했던지 딱 안전거리만큼 뒤로 물러나 하늘과 땅을 번갈아 보며 꾸지람을 듣는 아이처럼 기가 죽어 있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소독과 지혈을 하면서도 결국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미움과 정을 쌓으며 겨울이 가고 봄과 여름도 떠나보내는 동안 우리는 아주 조금씩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지난해 가을, 길냥이 의심이와 만난 지 일 년이 되어가던 무렵부터는 비로소 의심이가 나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화실로 가자면 시장을 지나는 동안 이층 화실 창밖이 올려다 보이는 지점이 있다. 어느 날 무심코 그 곳을 쳐다보다 기역자 건물 모서리에 의심이가 우두커니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간혹 다른 볼일로 작업실에 늦게 오는 날은 창문을 열자마자 왜 이제 오는 거야! 하듯 연신 눈을 깜박이며 냐옹, 냐옹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 때부터 나도 말을 해주기 시작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를 만났으며, 의심이 걱정도 했다는 등 시시콜콜하고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물론 그렇다고 의심이의 도도함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챙겨준 밥만 먹고 나면 여전히 떠날 때는 미련 없이 였음은 물론이다.

 

지난겨울은 매서운 추위와 함께 의심이의 태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먹을 것이 귀한 탓인지도 몰랐다. 어느 날 술친구와 어울리다 늦은 밤 귀가하던 길에 작업실로 왔더니, 어디선가 의심이가 번개같이 나타나 애처롭게 자신의 존재를 내게 알려왔다. 그 날은 이상하게 마음도 너무 아팠다. 저나 나나 한번 태어나 고단하게 왔다가 가는 삶이기는 하지만, 이 추운 밤도 배가 고파 잠 못 들고 나를 기다리다니...술에 취한건지 연민에 취한건지 자꾸 눈물이 났다. 그 후부터는 이상하게도 의심 많던 길냥이는 사료를 비비고 이런 저런 말을 해주는 동안, 마침내 창문 안으로 들어와 쪼그리고 앉아서 눈을 깜박이며 기다렸다. 눈을 서로 깜박이는 것은 이제 넌 내 친구야! 라는 뜻을 담고 있는 고양이들의 언어다. 우리도 참 긴 시간의 능선을 타고 오르내리며 마침내 친구가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이름도 의심이를 안심이로 개명했다. 야생으로 길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하니 아무리 누군가 친절하게 대해준다 해도 의심과 경계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산다. 나도 그 사실을 이해한 후부터 안심이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겨울도 서서히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던 무렵부터 안심이는 새로운 친구를 하나 데리고 왔다. 온 몸이 까맣고 입 주변과 발, 배 부분이 흰 녀석이다. 안심이가 먼저 식사를 하고 물러나면 지난날 의심이의 태도 그대로 잔뜩 긴장한 새로운 의심이가 아주 신중하게 밥그릇에 접근해 허겁지겁 사료를 삼킨다. 그래서 아예 새 밥그릇을 담아 창 밖에 내놓고 살짝 문을 닫아준다. 아마 새 의심이도 215호 창안과 밖을 함께 동행할 시간 따라 점점 안심이가 되어갈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그렇게 겹치는 시공간이래야 얼마나 되겠는가! 한 두 해라도 하루 한 끼 밥그릇을 사이에 두고 서로 무엇인가 따듯한 인연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심이와 안심이가 너무나 고맙다.

 

올 봄에는 남문상가 2215호의 시간 속으로 내 친구 의심이와 안심이의 뒤를 따라 또 어떤 인연들이 흘러 들어오려는지, 그래서 그 여리고 예쁜 것들이 그림 속 어디로 스며들어서 무엇으로 빛나게 될 것인지, 새삼 기대와 설렘이 겹치고 있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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