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와 대파 한 단

 


 운전을 하다보면 정말 본의 아니게 교통위반을 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길을 잘 몰라서 헤맨다거나 운전 중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미리 예상 진행방향으로 차선을 바꾸지 못한 경우, 혹은 긴급한 볼일에 직면해있는데 목적지나 그 주변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을 때 등등 피치 못할 여러 상황에 의해 잠시 양심을 외면하게 된다. 그러나 나쁜 운전습관은 순식간에 심각한 인적 물적 피해를 유발하게 되는 위험성을 늘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느 운전자라도 자신의 과오에는 다양한 변명을 해대면서도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대단히 예민하게 반응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고의성이 아주 농후하고 상습적인 난폭한 위반자를 만나게 되면 결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관대한 용서를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다.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런 저런 사소한 위반을 하다가 어느 불운한 날 제대로 된 무법자를 만났다. 그 운명적인 날 나는 편도 3차선 중앙차로에서 직진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방 도로는 편도 1차선으로 줄어드는 곳이었기 때문에 1차선은 좌회전 전용이었고, 3차선은 우회전 직진 겸용이라 당연히 나는 3차선에 나란히 서있는 차에만 신경을 쓰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내 좌회전 직진 동시신호가 들어오자 우측 차량을 살피며 출발을 했다. 그런데 이때 당연히 좌회전을 해야 하는 좌측편차가 갑자기 돌진해 들어오더니 내 차를 앞지르려고 시도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반사적으로 속도를 줄였고  아슬아슬하게 내 차를 추월한 그 차는 유유히 앞서나갔다. 그 모든 상황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관계로 어안이 벙벙해 앞차를 따라가면서도 안도의 마음 외에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앞차가 아무런 신호도 없이 갑자기 우뚝 서버린 것이다. 다시 기겁을 한 나는 급제동을 걸어 가까스로 충돌을 피하며 엇비슷하게 멈춰 섰다. 당연히 내 뒤의 차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만한 소음이 숨 가쁘게 들려왔다.

 

도대체 저 인간은 뭐지?


 이젠 정말 마음이 울컥해왔고 뭔가 제스처를 취하기 위해 겨우 공간을 확보해가며 앞 차 옆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는데 갑자기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맨머리 하나가 드럼통 비슷한 양복 몸집으로 튀어나왔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서 어리둥절해 하며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남자는 뭐 불만 있어? 하는 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쓰윽 노려보았다.  그제야 나는 이 분(?)이 소위 깍두기라 불리는 사람 같다는 데 까지 인식의 촉수가 뻗어나갔다. 물론 상대방이 명백하게 잘못을 했기 때문에 피해자인 내가 최소한 큰 소리로 항의라도 해야만 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상황에 직면했지만 웬걸, 나는 그동안 불의에 대한 참을성이 엄청 대단해졌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차를 빼내 얌전하고 묵묵하게 가던 길을 갔다. 결코 유쾌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자책하며 슬퍼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나는 그 일을 가급적 빨리 잊고 싶었고 또 서둘러 잊었다.


  그러나 운전은 여전히 계속되는 일상이었고 당연히 크고 작은 위반도 피아간 반복되었으나 그 모두가 다 이해와 용서가 되는 범위 안이었다. 그렇게 상처가 아물어가던 어느 날 장소와 차량은 달랐지만 아주 비슷한 환경에서 난폭한 운전자를 또 만나게 되었는데, 그 차도 전번처럼 무지막지하게 앞지르기를 하더니 나의 불안한 직감대로 우뚝 서버렸다. 그래서 황급하게 브레이크 폐달을 밟고 어수선하게 상황에 대처한 것도 전번과 거의 같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나 스스로 다음에 일어날 상황에 대한 학습효과가 본능적으로 충분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어쩌지...하며 갈등하고 있는데 어김없이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난데없이 대파 한 단이 든 장바구니가 불쑥 허공을 휘젓더니 이어서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전형적인 동네 아줌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그 순간 아주 놀라운 일이 다름 아닌 나의 내부로부터 일어났다.  상대방이 깍두기기 아니라 아줌마란 사실이 확인되자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니 아무리 운전을 막 한다지만 도대체 이 무슨...! 이런 마음이 발끈하고 치밀어 오르는 가운데 조수석 문을 내리며 지난번 밀린 한풀이까지 보탤 작정을 했다.


 그러나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분노의 온도계는 상대방에 따라 이렇게 자유롭게 조절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나는 전광석화처럼 스치는 양심의 외침을 듣고 만 것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 훨씬 전에 상황에 따라 본능적으로 이중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스스로를 생각해보니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대파 아줌마가 빤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도 죄인처럼 말없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와야 했고, 그 후부터는 깍두기가 나오고 대파가 든 음식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더 겸손해지는 식습관도 얻었다...


이 영 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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