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산수                


나는 원래 셈에 약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해서 수 개념 자체에 둔감하다는 표현이 옳겠다.

아주 기초적인 계산부터 전화번호, 약속시간, 연대표 암기, 심지어 매년 먹어가는 나이까지 자주 잊거나 혼동해 그야말로 나이 값을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섞여 살다보니 나름대로 계산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은 유지되는 듯도 한데, 이해득실이 모호한 경우일수록 내 숫자 건망증은 더욱 심해지다가 손해를 볼만한 일, 혹은 이득이 예감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좌 뇌의 활동이 평소에 비한다면 거의 초능력을 발휘 한다 싶을 만큼 셈에 대해 민감해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사회생활 속에서 내가 믿고 있는 정당한 계산의 법칙이란, 내가 양보하면 타인 또한 근사치만큼은 양보해줘야 세상이 행복해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양보는 나부터 먼저 한다는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그러다보니 간혹 내가 더 많이 덜어내야 하는 셈, 나아가 남은 전혀 양보하려 들지 않을 때는 내가 몽땅 덜어내야 평화로운 환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값이 여전히 같이 나온다는, 고도의 수학 공식을 대입한다 해도 답이 없을 상황에 부딪치면 계산은커녕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악감정만 들끓어 나의 산술감각은 거의 공황상태에 도달 한다

그래도 명색이 그림을 통해 세상 한곳 이나마 아름다운 정신으로 채워 보겠다는 그림쟁이는 뭔가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성이 맹렬하게 본능을 억누르는 가운데, 용서는 힘 있는 자만이 베푸는 아량이라는 오만함과 힘없는 사람은 속수무책 당하다 체념할 뿐이라는 자괴감까지 휘몰아치며 비좁은 마음을 휘젓곤 했다.

일상 속의 삶이란 도덕교과서처럼 진행되는 것은 아니어서 모순에 가득 찬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무리 목청을 높여 더하거나 빼고, 곱하고 나누어 보아도 결국 상호간에 남는 것은 상처뿐이란 사실을 깨우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또한  비록 셈에 둔하다 해도 나만 져주면 세상이 한 순간에 평온해진다는 답도 어렵지 않게 나왔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 자신을 이겨낼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기에 말처럼 쉽게 행해지지도 못했다

요즈음에 와서야 한 조각의 자존심이나 몇 푼의 금전적 손실을 못 참아 악연을 만드는 것 보다는 나의 양보가 결과적으로 좋은 인간관계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그게 정말 셈을 제대로 하는 삶이라 생각해 보곤 한다.

게다가 희생과 봉사라는 아주 값진 셈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새삼 되돌아보게 되었다.

살아갈수록 용서 받을 일과 용서해야 할 일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하루를 정리하고 반성하며 능력 밖의 셈을 하려고 머리를 싸매기 보다는 내가 얼마를 더하고, 누가 얼마를 빼든지 간에 늘 상호행복이라는 일정한 답이 나오는 삶을 살고 싶다고 다짐해본다.

그러면 나도 제법 계산을 잘한다는 셈이 나오는 것이고, 그래서 더 이상 자질구레한 숫자에 약하다는 생각까지 스스로 버리게 될 것도 같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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