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이야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미대를 가려던 계획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벽에 부딪쳤고, 문예창작학과를 진학하려던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려왔는데 갑자기 길이 끝나더니 그 곳 부터는 그냥 벽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엉거주춤 서버린 나는 미처 상황에 적응도 못하고 심하게 방황했다.
밤새 어둠과 마주 앉아 술도 마셔보고, 뒷산 골짜기 끝까지 들어가 고함도 수없이 질러댔지만, 겨우 스무 살 문턱에 서서본 세상은 너무나 아득하고 막막하게만 느껴졌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실기대회에 참가해 상장을 받아다 나르기 바빴을 만큼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내게 아버지는 은근히 집안에 인물 하나 난다고 큰 기대를 하셨다.
그런 까닭에 고단한 삶에 대한 보상심리 까지 얹어 바라보던 둘째아들이 전혀 이해 못할 추락을 거듭하자 당신의 심기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술을 한잔 드시고 귀기 한 어느 날 마침내 아버지는 나를 부르셨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생각 중입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자 마침내 아버지는 속내를 드러내셨다.
<이놈아 나도 아들자랑 한번 해보자! 김씨네 아들은 대학가고, 박서방 아들은 은행에 취직했단다. 그런데 너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고생해서 뒷바라지 해준 만큼 어깨 펴고 다니게 해달라는 게 억지는 아닐 터인데..요즘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미 마음속에 한 뼘의 여유조차 없었던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아버지 체면은 중요하고 자식의 힘든 마음은 관심조차 없나요?>
순간 아버지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고 내 왼 뺨도 덩달아 번쩍 했다.
그 길로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입던 옷 그대로 땡전 한 푼 없이 나선 길이었지만, 어서어서 이놈의 집과 지루한 동네에서한걸음이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었다.
그렇게 70여리를 걷고 걸어 같은 미술반으로 3년을 지내며 마음을 나눈 친구를 찾아갔다.
이미 어둠이 내린 동구 밖을 한참동안 서성이다 대문을 두드리니 이내 친구가 나왔고, 부모님들도 놀란 듯 내다보셨다.
그 날 이후 한 달 여를 그 친구 집에 얹혀 지냈다.
같이 산에도 가고, 들일과 집안일도 거들었지만, 그 집 어느 누구도 내가 갑작스레 나타난 까닭을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에서 싹이 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감당하기 힘들게 자라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찾아올 때만큼이나 서둘러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인사를 하자 친구도, 부모님도 그저 환하게 웃어주기만 했다.
집을 박차고 나올 때 까닭모를 설움과 분노,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들떠 숨이 차도록 달려만 왔던 그 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 걸음은 집이 가까워질수록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나설 것이 분명한 아버지의 노여운 얼굴과, 그걸 필사적으로 말리겠다고 울부짖을 어머니의 얼굴까지 겹쳐 더욱 느려졌다.
비에 젖은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을 즈음 보이는 동네 불빛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옷이 거의 젖을 때 까지 대문 앞을 서성이다 마침내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래 한번만 용서를 구해보자, 그래서 안 되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어!>
결심이 서자 마음도 급해졌다. 아니 이 결심이 너무 빨리 허물어질 까봐 두려워 마당을 가로질러 그냥 뛰어가 벌컥 방문을 열었다.
순간 내 눈에는 저녁 식사를 하다 놀라 일제히 나를 올려다보는 아버지, 어머니, 형과 두 동생의 모습이 둑 터진 저수지처럼 밀려왔다.
나는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던 숨 막히는 긴장감을 견디느라 방문 고리를 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정적을 깬 것은 어머니의 번개 같은 동작이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몸을 돌려 아랫목 이불을 들추시더니 밥공기 하나를 마술사처럼 건져 올려 밥상에 얹으셨고, 잘 훈련된 병정들처럼 두 동생이 밥공기 사이 좌우로 여백을 만들어주었다.
<어서 밥부터 먹자! 네가 금방 들어올 것 같아서 매일 묻어두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꼬리 따라 내 시야도 아득히 흐려졌다.
밥알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정신없이 입 안으로 퍼 넣는 동안 갑자기 환해오는 자식의 마음을 눈치 채셨는지 아버지는 수저를 드신 채로 아주 작게 웃고 계셨다.
이영철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