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 그림을 만나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 100선인가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활자만 빼곡한 문학서적을 그만큼 읽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무렵이라 왠지 이 시련을 넘어서지 못하면 시작부터 모든 것이 어긋날지도 모른다는 묘한 부담감도 따라다녔다. 고등학교에 와서는 그림 그리는 일에 열정을 쏟다보니 결국 100이란 숫자를 다 채우지 못하고 청소년기가 지나갔다. 물론 아쉬움보다는 더 큰 안도감이 슬그머니 뒤따라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고나니 이 시대 지성인이 반드시 읽어야 할 교양, 인문, 사회, 철학 등의 도서들이 줄지어 소개되었다. 심지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명시, 들어야만 하는 음악, 떠나야할 여행지, 올라야 할 산 등등 아예 목숨과 인생을 담보로 압박하는 훌륭한 성인과 예술가를 위한 덕목들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한 창의성 실험에 의하면 동일한 미술재료임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직접 나누어준 그룹과, 학생 스스로 선택한 팀을 구분해 그림을 그리게 했을 때, 결과물에 나타난 완성도와 창의성이 매우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특히 미리 정해놓은 것을 해야 할 경우 오히려 흥미가 떨어지는 성격 탓에 내 인생의 숙제는 쌓여만 간다.

 그런데 그 와중에 유일하게 죽기 전에 꼭 봐야할 100이란 숫자를 훌쩍 넘긴 분야가 바로 영화보기다. 원래 이미지에 민감했던 데다 미술을 전공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사진을 거처 영화 속으로 빠져든 덕분이다. 사실 수많은 활자들의 숲을 걸으며 스토리를 이해하고 이미지를 상상해나가는 방식보다는, 모태 같은 어둠에 파묻혀 생생하게 걸어 나오는 빛의 세상을 만나는 것이 훨씬 더 직접적이고 경이롭다. 그 속에 정신의 저울추를 내려놓고, 이미지와 스토리가 함께 춤추고 때로는 눈물 흘리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 자신의 인생도 함께 계량해 볼 수 있는 것은 영화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이다.

 3년 전 영화전문 기자 친구와 시인, 화가들이 영화, 시 그림을 만나다란 주제로 모였다. 함께 영화를 보며 영감을 얻고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영화에 대한 종합적인 소개는 기자 친구가 맡아 매주 신문지면을 통해 1년 동안 독자들과도 만났다. 탈장르 징후는 후기 모더니즘을 거처 동시대 예술과 사회를 지배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통해 실타래처럼 풀려나온 언어와 색, 선을 함께 교직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시도였다. 내 작업으로 배정된 스탠리 큐브릭과 잭 니콜슨의 섬뜩한 조합, 코헨 형제의 폭력미학, 제임스 카메룬의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 우편배달부 마리오의 순수한 영혼, 그루누이의 광기와 집착이 스며든 향수, 로키 발보아의 강인한 투지도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연초에 시작된 이 항해는 연말에 닺을 내리고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책으로 묶이고 전시회를 통해 정리되었다. 누군가가 시킨 것이라면 성가시고 불편할 수 있는 일도 스스로 좋아서 하면 개인의 성취를 넘어 사화와 문화적으로도 긍정적인 성과를 만들어낸다는 사실도 새삼 확인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인생과 예술을 소통할 좋은 친구를 만난 기쁨도 빼놓을 수 없다.

 며칠 전 영화, 시 그림을 만나다 두 번째 시즌을 준비하는 모임을 가졌다. 시인과 화가 몇몇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매월 아주 깊은 영상미학의 늪 속으로 빠져들 작정이다. 이 모임을 주도하며 이번에도 자신의 둥지를 내 놓은 친구는 이순(耳順)이 넘으면 인간의 오욕 칠정을 주제로 열 두 편의 영화를 만들 계획도 진행 중이다. 그의 작업실<필름통>에 붙어있는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의 짧은 시 한 편은 영화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깊은 서정을 거느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만나려는 주인의 마음을 잘 알려준다. 벗어 놓으세요./내려놓으세요./여기서는 당신의 슬픔을/침묵하셔도 좋습니다.

 영화에 대한 기억이 늘 환한 것은 오히려 어둠 때문이다. 사실 어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 단 한편의 영화도 온전하게 볼 수가 없다. 빛은 어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만 제대로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인 가을이다. 쓸쓸함에 대하여 슬슬 염려가 되는 분들은 명작을 테마로 명화로 거듭난 닥터지바고, 폭풍의 언덕,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등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 몇 편을 스스로 정해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영철 (화가)
매일신문 문화칼럼
2011년 9월 24일(금)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4985&yy=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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