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의 크기와 샘의 깊이


< 사람은 그릇이 커야한다 > 

70년대를 횡단하던 고교시절 집과 학교에서 수없이 들어오던 훈육의 끝에는 늘 이 말이 따라왔다. 사회 구석구석을 통제하던 경직된 체제 속에 가난과 꿈,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가파른 언덕을 너나없이 오르던 시절, 나도 습관처럼 그릇을 키워야 하는 일을 일생의 중요한 사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때 내 삶의 좌표가 되어준 분이 태암 선생님이셨다.

문학과 미술에 다 관심이 컸던 내게 자상하고 따뜻한 인간미 넘치던 국어선생님은 예민하고 열등감 가득했던 나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퍼주셨다. 그 마음은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중년이 된 지금까지 전혀 변함이 없었다.

태암 선생님은 이제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거친 교직생활을 청산하시며 그동안의 인연을 정리한 문집 「만남」을 엮어내셨는데, 봉정식 행사는 제자와 벗들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그날 나는 한 사람이 평생을 두고 일관되게 나누어준 우정과 사랑의 결과가 한 공간 가득 넘치는 장엄한 퍼포먼스를 볼 수 있었다.

지역 유림, 대학과 사회동료, 제자들은 한 결 같이 그간 나누어 받은 인간적 온기를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 내용이 하나같이 그동안 나만 받은 줄 알고 있었던 사랑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서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이미 인간을 그릇의 크기에 비유하는데 잘 적응되어있던 나였기에 몇 사람에게 퍼 주기도 비좁은 그릇을 지닌 내가 이해하기엔 당신이 저 많은 사람들에게 퍼준 인정의 양이 너무 크고 많았던 까닭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깨달은 것은 세상 사람들을 재단하는 나의 잘못된 사고방식이었다.

선생님은 큰 바위가 품고 있는 작지만 깊은 샘이셨다. 그릇은 아무리 커도 퍼주다 보면 끝이 보이기 마련이지만, 샘은 비록 눈에 쉽게 띄지 않더라도 퍼낼수록 더 많이 고이는 법이다.

어쩌면 개인사나 역사는 그릇의 크기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그릇마다에 소리 없는 실천으로 채워지는 샘물의 양이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사는 것이라는 말을 시간이 흐를수록 실감하고 있다. 태암 선생님을 생각하면 내가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 정신의 빚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껴진다. 그래서 왜 좀 더 겸손해야 하고 감사하며 세상과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지도 확연하게 이해가 된다.

5월이 오니 선생님 생각이 더 간절하다.

이 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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