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원과 천만 원

 작업과 더불어 꾸준하게 해온 일은 일 주일에 한두 번씩의 출강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제법 세월이 쌓여 졸업한 제자들이 작가와 교사활동을 열심히 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보람도 커졌다. 물론 실기실과 강의실에서 배운 이상과 사회에 나가서 부닥치는 현실의 간극은 꽤 넓어서 종종 그 문제를 호소해오기도 한다.

 어느 날 아동미술학원을 하는, 이제 갓 새댁이 된 제자로부터 메일이 왔다. 미술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척도, 교육적 이상과 경제적인 현실상황의 충돌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특히 학부모와 수강료 만 원 차이를 놓고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자신도 어느덧 속물이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눈에 들어왔다. 직접 교육현장에 서보니 경기가 나빠지면 일순위로 끊어버리는 것이 미술이고, 상당수의 아이들은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라 학교 과제 때문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곤혹스러움도 토로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피부관리숍’을 하는 친구에게 하소연했더니, 아직 멀었다며 간, 쓸개 다 빼주라는 충고도 받았다고 했다. 그 친구는 그렇게 해서 한 달에 천만 원을 번다는 부연설명도 있었다.

 그래도 시간을 쪼개 작품을 하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아이들과 교감하며 비록 만 원 때문에 옥신각신해도 천만 원 버는 친구보다 덜 행복하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런 스스로가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좀 혼란스럽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러다가는 사회적으로 실패한 삶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며 마음의 여유가 좀 더 생겼으면 좋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글을 읽고 나니 십수 년 전 뇌출혈로 쓰러지신 어머니가 입원했던 병실 풍경이 떠올랐다. 우리 병실 바로 옆방에는 정년퇴임을 얼마 남기지 않고 발병한 음악선생님이 있었다. 그분은 병세가 많이 심해서 온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외동딸이라는 아주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꾸만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대는 바람에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병동 전체를 더욱 무겁게 했다. 물론 여기저기서 불평이 새어나와 간호사와 회진 다니는 의사선생님에게로 전해졌지만 그분을 선뜻 옮겨갈 곳도 마땅치 않은 듯했고, 오히려 양해를 구하는 딱한 사연만 되돌아왔다.

 작곡을 전공했다는 그분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상한 교육자로, 따뜻한 인품을 지닌 사회인으로 아주 성공적인 삶을 살아오셨다고 한다. 다만 바쁜 일상에 떠밀려 다니느라 대학시절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음악적 성취를 미루고만 살아온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던 모양이다. 결국 다음을 기약하며 벼르고만 있던 길은 한순간에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막상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면서부터 갑자기 우뇌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평소 그토록 염원하던 기막히게 아름다운 악상이 끊임없이 솟아나왔다. 표현할 방법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상황에 이르러서야 폭풍처럼 음감이 휘몰아치니 눈앞을 스쳐가는 악상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그 선생님의 안타깝고 괴로운 절규가 비로소 가슴에 와닿았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미루기만 하는 사람은 결국 성공한 삶을 완성시킬 수 없다는 자각도 그때 했다.

 제자에게 답장을 쓰며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너무 빠른 열차만 타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행복이란 간이역을 잘 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래서 간, 쓸개 다 빼주며 하기 싫은 일과 자신의 정신적 가치를 맞바꾸는 것보다는, 불편하기는 해도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자네의 모습이 더 소중해 보인다고 응원을 했다. 따라서 바쁜 일과 중요한 일을 스스로 구별하고, 아무리 큰 이익이 눈앞에 보인다 해도 지금 행해야할 작고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버리지 않는 것이 곧 성공한 인생이라는 믿음도 전했다. 눈물과 웃음이 흐르는 곳으로 인연도 흐르고, 우리의 마음이 흐르는 곳으로 예술도 흘러가니까.


이영철/화가
매일신문 문화칼럼, 2011년 10월 21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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