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밥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화가가 되려던 계획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좌절되고, 대신 문예창작학과를 진학하려던 일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십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갑자기 부딪친 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심하게 방황했다. 온 종일 수많은 생각들이 어지러운 바람처럼 내 마음을 휩쓸고 지나갔다. 해가지면 하염없이 어둠과 마주 앉아 새벽을 기다리다가, 동트는 무렵 자주 뒷산 골짜기로 들어갔다. 답답한 마음에 고함이라도 후련하게 쳐보고도 싶었지만, 숨 막히게 들어찬 나무들의 기운에 눌려 단 한 번도 실행해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미술실기대회와 백일장에 참가해 상을 받아 나르기 바빴지만, 가난한 예술가의 삶을 원치 않으셨던 아버지는 둘째아들의 이해 못할 행동에 몹시 불편해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을 한잔 드시고 귀가하신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이놈아 내 친구들 아들은 대학도 가고 은행에 취직도 했단다. 그런데 너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고생해서 뒷바라지 해준 만큼 어깨 펴고 다니게 해달라는 게 억지는 아닐 터인데... 요즘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그러나 이미 마음속에 한 뼘의 여유조차 없었던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아버지 체면은 중요하고 자식의 힘든 마음은 관심조차 없나요?>순간 아버지의 눈에서 불꽃이 솟구치더니 내 뺨도 덩달아 번쩍 했다. 나는 그림도구며 책들을 있는 대로 내팽개치고 날뛰다 이번에는 형에게 또 실컷 얻어맞았다.

 그 길로 집을 나왔다. 입던 옷 그대로 땡전 한 푼 없이 나선 길이었지만, 어서 빨리 동네로부터 한걸음이라도 멀어지고만 싶었다. 그렇게 70여리를 걷고 걸어 같은 미술반으로 3년을 지내던 친구를 찾아가 들일과 집안일을 거들며 한 달 여를 얹혀 지냈다. 물론 그 집 어느 누구도 내가 갑작스레 나타난 까닭을 묻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사물들과 의식이 객관적으로 물러나 앉을 무렵이 되자, 뻔뻔스럽게 빈둥거리며 세상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진 듯 영혼이 무거워져 꼴사나워진 내가 보였다. 미안함과 죄책감의 씨앗은 마음 한 구석에서 싹이 터 자라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빠른 속도로 커져갔다. 그래서 불쑥 찾아올 때처럼 서둘러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인사를 하자 친구의 부모님은 이번에도 그저 말없이 웃으며 보내주셨다. 집을 박차고 나와 원인모를 설움과 분노, 자괴감을 뿌리며 왔던 그 길을 천천히 복기하듯 되걸었다. 그러나 집이 가까워질수록 아버지의 노여운 얼굴과, 울부짖을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지는 바람에 자꾸 걸음이 느려졌다. 보슬비가 내리던 하루가 완전한 어둠으로 내려앉을 즈음 동네에 들어선 나는, 옷이 거의 젖을 때 까지 집 앞을 서성이다 마침내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리고 결심이 허물어질까봐 두려워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순간 내 눈에는 저녁 식사를 하다 놀라 일제히 나를 올려다보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두 동생의 모습이 둑 터진 저수지처럼 밀려왔다. 그 짧은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던 숨 막히는 긴장감을 견디느라 방문 고리를 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정적을 깬 것은 어머니의 번개 같은 동작이었다. 어머니는 갑자기 몸을 돌려 아랫목 이불을 들추시더니 밥공기 하나를 마술사처럼 건져 올려 밥상에 얹으셨고, 두 동생은 잘 훈련된 병정들처럼 밥공기 사이로 여백을 만들었다.<어서 밥부터 먹자! 네가 금방 들어올 것 같아서 매일 묻어두고 있었다...>어머니의 말꼬리 따라 내 시야도 아득히 흐려졌다. 아무 말 없이 수저를 내려놓으신 아버지는, 밥알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정신없이 입 안으로 퍼 넣고 있던 나를 바라만 보고 계셨다.

 그날 이후에도 내 생활은 별로 개선된 것 없이 한동안 흘러가다가, 공식적으로 집을 나오게 되면서 다시는 온 가족이 마주하는 밥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늘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하셨고, 나 또한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했지만, 간혹 찾아간 고향집에서조차 아버지와의 개인적인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마음에 난 균열을 메우는 길은 어서 내가 무엇이 되든 내 자리를 찾아야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렇게 몇 년을 더 방황하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화해의 시간도 그만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날은 오지 않았다. 내가 만학으로 대학 시험을 치르던 그날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삼십년 전,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아주 추운 날 아버지를 선산에 모신 후 지금까지 당신을 생각하기만 하면 마치 방금 베인 상처처럼 쓰리고 아팠다. 내가 드린 잘못과 실망보다는, 죄송하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드린 것에 대한 후회가 더 깊었기 때문이다. 무덤 앞에서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마음 속 깊이 뿌리박힌 아픔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카시아 꽃향기 가득한 지난 어버이날 어머니마저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중환자실에서 큰 고통을 겪으시는 동안 다시는 아버지처럼 말 한마디 못하고 보내드리는 일 없도록 곁을 지켜드렸다. 의식이 잠시 돌아오셨을 때 이 세상에서 드신 마지막 음식이 된 죽 몇 수저도 먹여드렸고, 호흡이 멈추시던 순간까지 따뜻하던 손도 꼭 잡아드렸다. 그리고 이제 세상 모든 걱정과 아픔 다 내려놓으시고 편히 주무시라고 작별인사도 올렸다. 그래서 어머니 보내는 슬픔은 아버지와 달랐다. 어머니는 떠나시며 또 다른 선물을 주셨다. 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이셨기 때문에 언제든 국립묘지에 가실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어머니와 함께 영천 국립호국원에 모시기로 결정을 했다. 3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무덤의 파묘와 개장, 화장과 호국원 국립묘지 안장으로 이어진 이장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 고향 선산으로부터 영천 호국원에 가는 내내 나는 그토록 한이 되던 아버지를 꼭 안아드릴 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죄송하고 보고 싶었는지, 그리고 무슨 일들이 지나갔는지 참 많은 이야기를 해드렸다. 합동 안장식이 진행되자 당신들의 시간이 고스란히 내 가슴에 남아서, 이제 내가 보내야 할 시간으로 이어져 길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많이 그리워지겠지만 더 이상은 슬퍼하지 않도록 나는 늘 길 위에 있겠다고 다짐을 했다.

 스무 살 문턱을 힘겹게 넘어서며 예술을 하겠다는 관념에 스스로 짓눌려 다니다 돌아온 철없던 아들이 허겁지겁 비웠던 그 밥공기에다, 오월의 산과 들에 지천으로 널린 아카시아꽃과 찔레꽃을 마음 가득 담아서 아버지와 어머니께 올렸다. 꽃밥 가득 차오른 어머니를 보낸 슬픔과 30년 쌓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바람에 실어 보내다보니, 환한 오월의 햇살 받으며 영원한 소풍 떠나시는 두 분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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