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배

 작업 외에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가 대구 근교 칠곡 소재 예술대학 출강이다. 늘 바쁜 일에 쫒기다 보니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국도보다는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한다. 그래서 한 주에 두 장씩 통행료 영수증을 받게 되는데, 나는 시내로 진입해 긴 교차로 신호대기 시간에 이것을 정성껏 접어 종이배를 만든다. 방학기간이나 휴강을 제외한 거의 매 주 두 개의 종이배가 생기는 셈인데, 이제 유리병에 그득할 만큼 양도 많아졌다.

 운전 틈틈이 종이배를 접다보면 꿈, 가난, 슬픔, 웃음, 그리움 등 온갖 일들이 그 배를 타고 내게로 온다. 아이가 대학 시험을 치른다고 힘겨워하는 요즈음은 이 녀석이 어느새 이렇게 컸구나 하고 새삼 시간의 빠른 물살을 실감한다. 그래서인지 종이배에 올라 항해를 하다보면 유치원 들어가기 전 꼬맹이 시절이 많이 생각난다. 봉산동 화랑거리에 있던 서점 뒷방에 세 들어 살던 시절은, 열정 하나뿐인 젊은 화가와 가난쯤이야 사랑이면 충분히 보상된다고 굳게 믿은 순수한 새댁이 차린 살림이라 참으로 미니멀리즘 작품 같았다. 누군가의 가르침대로 삶은 비움에 익숙해야 한다는데 동의하는 편이긴 했지만, 원래 가진 것 없이 비움을 이야기 한다는 자체가 나 스스로 왠지 궁색하고 쑥스러웠다.

 아이가 태어나고 기어 다닐 무렵이 되자 가난은 곧바로 가장으로서의 나를 현실적으로 압박을 했다. 작은 마당을 온통 뒤덮을 정도로 큰 석류나무가 있던 그 집, 환기도 잘 되지 않던 방에서 아이는 말을 배우고 사물들을 인지하기 시작하자 당장 급한 게 그림책이었다. 바로 방문만 열면 서점이고 국내외 동화집과 그림책들이 즐비했지만, 그것을 사 줄 형편이 못되었다. 그렇다고 파는 책을 빌려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잠시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내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림책을 사 줄 수는 없지만 그림을 그려줄 수는 있는 화가이다 보니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방바닥 근처부터 사과, 수박, 동물들을 하나씩 그리고 이름을 써주며 그림책을 대신했던 것이다. 어느 날은 바나나를 그려주고 이름을 반복적으로 설명해주자 바부라고 반응해 우리는 이 아이가 혹 천재가 아닐까 하고 며칠 동안 흥분했던 기억도 새롭다.

 벽지에 그린 교재는 아이가 커기는 대로 점점 넓어지고 높아져 마침내 온 방에 가득해졌다. 아내와 나는 다시 그 위에 새 벽지를 덧바르고 새로운 교재를 만드는 과정에서 서로 다투고 함께 웃으며 돈이 없어서 찾아온 이상한 행복에 빠져 지냈다. 어느 정도 말과 사물의 관계를 익힌 아이는 벽을 도화지 삼아 직접 그림을 그리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이에게 그림책 한 권 제대로 사줄 수 없었던 가난한 처지가 내심 서러웠다. 아마도 몇 번의 벽지를 겹쳐 바르며 수많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적었으면서도, 아이를 찍어주다 배경화면으로 남아있는 것 외에는 정식으로 기념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은 이유도 아마 그런 여유 없던 마음 때문인 듯하다.

 아이가 유치원을 들어가야 할 무렵 이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집이 전기누전으로 불이 났다. 우리는 근소한 시간차로 화를 면한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그을리고 타버린 벽지 교재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어차피 이사 나온 집이고 또 누군가가 살게 되면 당연히 사라질 벽지였지만, 아이와 나눈 사랑과 교감의 흔적들이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는 것은 훨씬 아픈 기억으로 각인이 되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 간 후부터 고등학교를 다니는 기간은 책을 못 사줘 안타까워해야할 일은 드물었다. 왜냐하면 묘하게도 내 아이의 성장 시기에 꼭 맞는 책들에 삽화를 그리는 일이 또 하나의 직업처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아이는 상당부분 아빠 그림으로 출판된 책을 보며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이배를 접을 때마다 낡은 기억창고의 먼지를 털어내며 건져 올린 풍경들이 이제는 아름답다. 기념사진이라도 찍어줄걸...참 아깝고 소중한 자료들인데...하는 아쉬움이 들 만큼 심리적 여유도 생겼다.

 어느 듯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눈부신 단풍은 이내 뒹구는 낙엽이 되어 소멸의 통로로 마음을 쓸쓸하게 할퀴고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삶을 종이배로 접어서, 그 배를 타고 항해하는 내 마음은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 해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즈음은 접은 종이배를 아예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하늘이나 바다를 항해하는 종이배에는 막 사랑은 시작한 연인이 타거나 매달려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흘러가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종이배의 빛깔은 무엇으로 칠할 것인지 생각을 거듭하고 있다. 오늘도 내 붓질을 따라 둥둥 떠다니는 종이배는 어떤 모습으로 오는 것이라 해도 나와 인연이 된 모든 것이 소중하다고 속삭이고 있다.

 

 화가 이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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