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기획특집-1
인연-이영철화가와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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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인연 .1] 이영철 화가와 혜민 스님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40304.010240814000001
영남일보
김수영기자
2014-03-04 08:17:25
소담하게 핀 이름 모를 꽃, 혜민의 책에서 눈부시게 피어났다
살다 보면 수많은 인연을 맺게 된다. 불가에서는 길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끼리 잠깐 옷깃스쳐도 인연이라 한다는데, 그 인연의 빛깔이나 모양은 너무나 다채롭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성장시키는 등 좋은 관계를 만들어주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 조금씩 삐끗하며 안타까움을 주는 인연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인연이 모여 삶의 모습이 만들어지고, 스스로 또는 타인을 성숙시키기도 한다. 영남일보가 새롭게 시작하는 시리즈 ‘인연’에서는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우연히 맞이한 인연이지만, 어느새 필연처럼 자리하고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들여다볼 기회가 되길 바란다.
이영철 화가 홈페이지서
소박한 작품에 매료된 혜민
‘멈추면 비로소…’ 개정판에
이 화가 작품 표지화로 실어
2012년 말부터 시작된 인연
혜민, 1월 서울전시 도우며
만남은 더 큰 감동으로
2년 전만 해도 이영철 화가는 혜민 스님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로 알고 있는 게 전부였다. 우연히 신문이나 TV에서 스님을 보면서 ‘생각보다 젊고 인상이 참 좋은 스님’이란 생각도 설핏 가졌다. 그러다가 2012년 말, 혜민 스님이 그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오게 됐다.
그 인연의 시작은 스님의 책을 출판했던 출판사의 편집장이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 화가의 그림을 보게 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화가의 그림을 본 편집장이 스님에게 이 그림을 보여줬고, 스님은 보자마자 무척 마음에 들어 그 화가와 계약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컴퓨터 안에 있던 이영철 화가의 그림이 두 사람의 인연의 끈을 엮어 준 것이다. 이 인연으로 혜민 스님의 책에 이 화가의 그림이 실리게 된 것은 물론, 이 화가는 혜민 스님의 도움을 받아 서울에서 첫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치기도 했다.
2012년, 혜민 스님의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100만부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리며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출판사와 스님은 개정판을 준비하며 새로운 화가를 찾으려고 국내외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며 다양한 작품들을 훑어봤다. 여기서 우연히 이 화가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작품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이 화가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붓 하나에 매달려 삶의 희망을 찾고 있었다. 2012년 5월8일 어버이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여파가 너무나 깊고 길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삶의 기쁨과 희망은 살아있었다. 사십구재가 진행 중이었는데, 수성아트피아에서 그해 12월 초대전을 요청해온 것이다.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서 심신이 바닥을 치고 있던 순간, 다시 바닥을 치고 올라올 힘과 희망을 준 것이 수성아트피아의 초대전이었습니다.”
수성아트피아는 지역에서 인지도가 상당히 높고, 유명 작가들의 초대전을 개최해왔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런 제의에 그의 가슴은 뛸 수밖에 없었다. 전시가 잡혀있으면 작업에 몰입할 수밖에 없으니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도 사라진다. 그는 이 요청이 들어온 늦봄부터 여름 내내 슬픔과 그리움 속에 전시를 위한 그림을 그렸다. 그때 작업한 작품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꽃밥’ ‘이만큼 너를 사랑해’ 등이다. 그는 전시 전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신작들을 올리기 시작했고, 이 작품을 출판사 편집장이 보게 된 것이다. 이 화가의 작품 중 혜민 스님은 ‘이만큼 너를 사랑해’를 특히 좋아했는데, 이것이 결국 개정판의 표지화가 됐다.
스님은 이 그림의 어떤 점에 푹 빠진 것일까. 이름 모를 수많은 꽃들이 빼곡히 피어난 언덕 위에 보름달이 두둥실 뜬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바쁜 일상을 잊고 잠시 여유를 갖게 해 준다. 초록색 들판에 수없이 핀 흰색 꽃들은 결코 크거나 화려하지 않다. 자잘한 꽃들이 소담스럽게 핀 언덕 너머로 둥글고 노란 달이 따스한 사랑으로 꽃들에게 달빛을 듬뿍 주고 있는 형상이다. 그 꽃밭 속에 남녀 한 쌍이 있다. 한쪽 구석에 꽃보다도 훨씬 작게 그려져 잘 살펴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연인처럼 보이는 이들은 포옹을 하고 있다.
“스님이 출판사에 제 그림 이야기를 해서 출판사 측에서 먼저 전화가 왔더군요. 스님의 책에 제 그림을 넣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지요. 그때 개정판이 나오며 2년 연속 베스트셀러가 되어 결국 책 판매가 250만부를 돌파했습니다. 스님이 제 그림을 좋아하고, 베스트셀러에 싣게 해준 것이 무척 감사했습니다. 수성아트피아 초대전, 혜민 스님 책에 그림을 넣은 일 등이 제게 큰 힘이 됐습니다.”
그는 혜민 스님에게 큰 고마움을 표시하지만 혜민 스님은 오히려 이 화가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겸손해한다. “이런 좋은 그림을 만나게 된 것은 오히려 제가 행운을 얻은 셈이지요. 이 화백의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제가 행복해졌습니다. 이만큼 사랑이 충만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남녀가 안고 있는 그림이지만 거기서 스님은 삶에 대한 사랑을 봤다. 이처럼 크고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 사회에 충만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스님은 이 그림에서 연인이 작게 나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했다. “사랑에 빠지면 이 세상에 나만 있는 것처럼 고요한 상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사라지기도 하고요.”
그 의미가 궁금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사람만 눈에 보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지극함, 희생 등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화가의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은 스님의 말 곳곳에서 묻어났다. 스님은 자신의 책에 들어간 그림은 삽화가 아닌 작품이라고몇 번이나 강조했다.
“삽화는 책의 내용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지만 제 책에 소개된 이 화백의 그림은 삽화용이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것들로, 책의 내용과 어울리게 배치한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제 책을 보면서 힐링의 시간을 갖는다는데, 여기서 그림이 차지하는 부분도 큽니다. 이 화백의 그림 자체가 충분한 힐링 요소가 되니까요.”
스님은 그림만큼이나 작가도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그림과 작가가 무척 닮았다는 해석이다.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들어 작품에 넣고 싶다니 두말 않고 화백님이 응해주셨습니다. 그때 역시 그림이 곧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박하고, 겸손하고, 따뜻한 그림 이미지가 바로 작가의 모습입니다.”
스님은 이 화가를 만나면서 더 그림에 빠져들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이 화가에게 무엇이든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방안을 찾던 중 서울 전시를 생각해내고 권유했다. 이런 스님의 설명에 이 화가는 오히려 자신이 도움을 더 많이 받고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책이 계속 잘 팔리니까 오히려 제가 더 덕을 봤습니다. 책 덕분에 제 인지도까지 높아졌으니까요. 지난해 여름 문경 봉암사에 계실 때 한 번 뵈러 갔는데 서울전시를 해보자 제안하셔서 매우 고마웠지만 사양했습니다. 아직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어본 적도 없는 데다가 아는 분도 없고 경비도 만만치 않으니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알아차렸는지, 스님이 전시 경비는 알아서 다 처리하겠다며 적극 추진해 지난 1월 갤러리고도에서 서울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서울전시에 대해 망설이자 스님이 전시에 드는 비용은 스님이 미리 작품을 사는 것으로 해서 지원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시려는지,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는 느낌입니다. 감사한 마음에 수익이 나면 일부는 절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다른 곳에 돌려드리고 싶다고 하자 스님도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그는 다행히 전시가 성공을 거둬 절에 수익금의 일부를 보내줄 수 있어서 더 큰 기쁨을 갖게 됐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 말 끝에 이 화가는 전시회를 하면서도 스님으로부터 또 한 번 큰 감동을 받았다는 말도 전했다.
“한국 사람 모두가 알아보는 유명한 스님이 지역의 이름 없는 작가를 위해 그림 하나만 보고 자신의 책에 넣을 그림으로 선택을 하고, 전시회를 위해 오프닝 당일 노래까지 불러가면서 애쓰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누군가를 도우려 생각했다면 지위와 명성을 떠나서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그날 새롭게 배웠지요.”
50대의 화가가 40대 스님에게서 배운 것이 이것만이었을까. 말은 않지만 그 속에서 이 화가는 삶 자체를 새롭게 배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좋은 인연 속에는 사랑이 충만하고 배움이 가득하다는 것을 기자 역시 새롭게 알게 된 만남이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