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화채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술대학으로 최종 진로를 결정하기까지는 다소 공백 기간이 있었다. 그림을 먼저 시작하기는 했지만 글 쓰는 일이 더 적성에 맞는 듯도 해서 어정쩡하게 고민을 하다 보니 더 그랬다. 그러다보니 미대 재수생도 아니고, 얼치기 문청도 아닌 그야말로 애매하고 모호한 상황에 빠져 넘쳐나는 시간만 주체를 못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상황이 이지경이라 집에 손 벌릴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일 아르바이트도 늘 있는 게 아니어서 돈을 넉넉하게 손에 쥐어보기가 쉽지 않았다. 밖으로 나돌며 자주 끼니를 거르다보니 막걸리 한주전자 혹은 라면이라도 배불리 먹게 되는 경우는 일진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해 중복은 유난히 무더웠다.. 반 백수 생활인데다 이 길이 화가나 소설가의 삶에 가깝다는 겉치레 멋에 빠져 지내는 것도 무더위와 배고픔의 참담한 고문 앞에서는 강풍에 흔들리는 깃발처럼 위태로웠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신념(?)을 가지고 버티고 있는 친구 집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동료의식으로 위안을 받곤 했던 탓에 이 복날도 그 친구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고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날은 정말 복날답게 더운 날이었다. 골목골목이 타오르고, 그렇게 온 도시가 타오르고 있었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보니 버스비도 아껴야 친구를 만나면 허기를 때울 정도의 동전이 손에 만져 졌다.
그래서 꽤나 먼 길을, 그 뜨거운 복날 뙤약볕아래 걷고 또 걸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그 길 끝에 친구가 사는 동네가 보이고 낯익은 골목도 눈에 들어왔다. 그때쯤엔 무슨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그냥 죽을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골목 중간쯤 나무그늘 아래 수박 파는 리어카가 눈에 확 들어왔다. 홀린 듯 다가가 졸린 듯 보이는 아저씨에게 그중 가장 작은 수박을 고르고 골라 물으니 돈이 턱없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겨우 사정사정해 동전을 몽땅 털어 배구공보다도 작은 수박을 손에 들고 친구 방으로 스며들어갔다. 당연히 녀석도 나보다는 내 손에 눈이 먼저 가더니만 근래 좀처럼 보기 드문 반색을 했다. 그러나 막상 수박을 내려놓고 보니 둘이 나누면 입가심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을 만큼 너무 작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수박화채였다. 얼음은 앞집 단골가게에서 좀 얻어오고 큰 플라스틱 바가지에 수박이 거의 껍질이 보일 때까지 긁어 넣으니 양이 제법 불어났다. 그런데 이때 친구가 더 큰 포부를 밝혔다. 물을 좀 더 붓고 대신 그만큼 설탕을 첨가하면 당도는 유지되고 수박화채의 양은 둘이 충분히 먹을 만큼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거의 평소 알던 친구의 머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천재에 가까운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이다. 이 더운 복날 시원하고도 배불리 먹자는데 나도 반대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그 다음부터 모든 일은 계획한대로 착착 진행되어 나갔다. 얼음에다 수박조각, 그리고 물이 첨가되고 드디어 찬장을 뒤져 커피 프림 병에 넣어둔 설탕을 찾아내 바가지에 부은 다음 휘휘 저었다. 그리고는 인내심을 유지하기 어려워 맛을 보니 아직 단맛이 올라오지 않았다. 다시 설탕을 더 넣어 젓고 맛보기를 두어 번 더 되풀이하자 그 긴 노동과 기대감의 끝을 따라 올라온 것은 확연한 짠맛이었다. 우리는 커피 프림 병에 담긴,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그토록 사랑스럽던 곱고 흰 분말이 설탕이 아니라 맛소금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후회와 아쉬움의 비명을 질러댔을 때는 이미 수박은 그 마지막 형태까지 녹아 사라지고, 대신 극심한 짠맛은 온 바가지에 샅샅이 퍼져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중복 한낮의 아스팔트길을 걷고 걸어서 주린 배를 채워보겠다고 전 재산을 몽땅 투자한 수박화채는 그렇게 허무하게 더위와 한숨 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또 기나긴 거리를 걷고 또 걸어 열대야로 끓어오르던 골방 작업실로 기어들어가 그 와중에도 장차 화가가 될지, 아니면 소설가가 될지 고민하며 끙끙 앓았다...
이 영 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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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박화채 2009.03.05 2
수박화채
2009. 3. 5. 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