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해의 끝에 서서


한 해가 끝이 보일 즈음이면 그동안 다듬고 채워 넣었던 계획들이 바람구멍처럼 숭숭 빠져나간 자리가 늘 아쉽다. 그리고 그 허전함을 보상받으려고 또 다시 새 해에 거는 꿈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이맘때면 나는 고혈압으로 쓰러지셨던 어머니 병간호로 40여일을 보낸 병실을 떠올리곤 한다. 그곳은 늘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환자들이 머물다 갔지만 모든 이의 유일한 소원은 하루빨리 건강하게 병실을 걸어 나가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육신은 아프지만 더없이 선한 얼굴로 금방 친해지고 걱정해주며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러나 병실을 찾아오는 건강한 방문객들은 각자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만큼 무거운 욕심을 이고 지고 바쁘게 드나드느라 우울한 일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제법 재력이 있으시던 할아버지 한 분의 경우는 당신이 위독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수많은 가족들이 몰려왔다가, 고비를 넘기면 간병인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뭔가 아쉬운 눈빛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를 되풀이해 인생의 가치와 효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했다. 다른 젊은 아저씨 한 분은 가족도 없어 아내만 늘 곁에서 간호를 했는데 어느 날 휠체어에 태워진 채 화장실에 버려진 것을 거의 한나절이 지나서야 주변에서 눈치를 챘다. 건강한 자신이라도 살 도리를 찾겠다고 사라진 사랑 앞에 절망한 아저씨의 눈물은 지금도 잊기 힘들다.

또 다른 병실에는 정년퇴임한 음악선생님이 계셨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부짖기만 해서 주변을 힘들게 했다, 사연을 알고 보니 작곡을 전공하신 그 분이 늘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작업을 해야지 하고 미뤄왔는데, 막상 사지를 전혀 쓸 수 없고 말조차 하지 못하게 된 지금에야 엄청나게 좋은 악상이 계속 떠올라 절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건강할 때 최소한 무엇이 진실로 중요한지는 알고 살아야겠다. 늘 사소한 욕심 때문에 바쁘다고 떠다 민 시간 속으로 사랑과 우정, 효도와 인생을 건 꿈 등 삶의 소중한 가치마저 속절없이 떠내려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또다시 한 해의 끝에 서보니 이제 정말 버릴 줄도 알 만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되어 새 해를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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