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멘 남자


바람이 제법 훈훈했던 지난 봄날 들뜬 마음에 모처럼 전시장 순례를 나섰다.

작은 배낭을 메고 봉산동 화랑가를 둘러보던 중 문화예술회관에서 진행 중인 모 선생님의 개인전 포스터를 발견했다.

평소 친분은 없었지만 선생의 그림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버스를 탔다.

전시회는 1층 80평 규모 전시실 두 곳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섰을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가씨 두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을 뿐 선생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고급스러운 액자에 평소 느꼈던 그 분의 이미지만큼 활달한 붓질의 작품들이 벽을 가득 장식한 채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가며 그림 감상에 열중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등 뒤쪽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가방 멘 남자 조심해! 언제 그림을 슬쩍 넣어갈지 모르니까 저런 사람 오면 항상 따라다녀.>

직감적으로 목소리의 주인이 화가라는 것을 알았으나, 돌아서서 인사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모르는 척 옆 전시장으로 옮겨가자 어느 틈에 두 아가씨가 먼발치에서 따라붙고 있었다.

유럽의 숱한 미술관 명화를 감상하면서도 당해보지 못했던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으며 우리나라 근대조각사에 큰 족적을 남긴 권진규 선생이 떠올랐다.

어렵던 시절 작업실에서 조각품을 도둑맞고 나서 오히려 안목 있는 도둑이라고 좋아하던 중 근처 쓰레기통 옆에 내팽개치고 간 작품을 발견하고 몹시 비관했다는 일화였다.

화가라면 그림 한 두 점쯤 잃어버리고도 기뻐할 정도로 마음이 순수하게 열려있어야 미술과 사회의 거리감이 한층 좁혀지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속에 문화예술회관을 나서니, 그 빛나던 날의 오후가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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