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행 쉼표 하나

 

 몇 주 전 어느 날 밤 친구로부터 문자메시지가 하나 왔다. <이형, 오늘은 달이 너무 아름다워요!> 나는 깜짝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연 언제 떴는지 조차 몰랐던 둥근 달이 네온에 물든 가로수와 어지럽게 뒤엉킨 전선들 사이로 아련하게 빛나고 있었다. 늘 무엇인가 바쁜 일상의 물살을 타고 흘러 다녀야 하는 도시에서는 특별한 계기 없이 온전하게 달구경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창백하지만 아름답게 솟은 달이 새삼 경이롭게 보였다.

 달 편지를 보낸 벗은 방천시장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의 작업실은 불에 탄 건물 두 칸 중 하나를 대충 가리고 땜질해서 사용하는 공방이다. 위태로운 문틀 하나 사이에 두고 가려진 저쪽 공간은 불길에 얼룩진 회색빛 내벽과 숯덩이가 된 기둥 잔해들이 날 것 그대로 남아있는 폐허지대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곳은 온통 불길로 정화된 곳이라 그런지 들어서기만 하면 마음 밑바닥까지 단숨에 걸어 내려가게 하는 맑은 기운이 있다. 우리는 가끔 이 폐허 속에 태아처럼 들어앉아 감성의 실타래로 직조된 멍석을 깔고 탁주잔을 나누곤 한다. 이곳에서의 낮술은 수많은 미학적 담론 혹은 침묵으로 휘감은 시간의 바퀴를 굴려대도 여전히 해가 지지 않는 넉넉함이 있다. 또한 황혼병자처럼 일몰의 아쉬움을 따라온 날은 불길이 치솟아 올라간 하늘 길 따라 어느 순간 불쑥 고개를 내밀고 휘영청 떠오르는 달을 만나곤 한다.

 폐허는 존재의 욕망이, 영광과 몰락의 아픔을 동시에 거느리고 소멸의 통로로 느리게 흘러가는 어느 지점에 있다. 이곳을 지배하는 색은 단연 회색이다. 원색의 능선을 넘어 중간색의 골짜기를 거쳐 완전한 검은 빛으로 가라앉기 직전의, 애잔함과 슬픔이 깊고 넓게 번져 오히려 무표정하게 보이는 색이다. 그러나 흑백논리란 가이드라인을 치고 선명하고 확실한 피아관계를 선호하는 사회 속에서 회색은 모호하고 이상한 색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이쪽과 저쪽을 다 이해하고 포용하며, 화해를 시키려고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종종 회색주의자로 분류된다. 도대체 확고한 신뢰를 보낼 수 없는 <어중 삥삥이>에 속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회색은 소통의 중심에 있는 색이다. 화려한 원색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그 주변의 모든 것을 희생으로 감싸 안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달은 얼마나 높은 곳으로 솟아 무엇으로 가득 채워야만 찾아오는 것일까? 명확한 확인이 거듭 필요한 사랑, 비교우위가 선명한 사회적 성취, 손익계산이 분명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떠오른 달은 아무리 터질듯 부풀어 올라도 궁극적으로는 공허한 애드벌룬과 다르지 않다. 이차대전 이후 폐허를 딛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우리나라는 전자, 무역, 문화 체육 등을 망라해 수많은 분야에서 세계1위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지수가 오히려 세계 최저 그룹에 머물러 있는 것은 회색을 포함한 중간색의 힘을 외면하는 상대적 빈곤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방천시장에 낡은 시계처럼 들어앉은 친구와 어중 삥삥이 벗들은, 모두 이곳의 잿빛 폐허가 담아내는 깊은 서정을 타고 홀연히 떠오르는 소박한 달을 닮아서 참 좋다. 이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린 공간 속에서도 고개만 들면 환하게 찾아오는 고요한 세상을 늘 확인시켜주니까 말이다.

 내 마음에 떠있는 행복한 달 그림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희망을 비벼 넣은 식사를 하며 웃음과 근심을 함께 나누던 가난한 시절에 머물러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당시 부족했던 것들이 조금씩 나아졌지만, 정작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할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 버렸다. 결국 내가 본 행복이란 아픈 마음으로 퍼 담은 딱 한 그릇의 공기 밥과 같다. 무엇인가 더 담으려면 반드시 담겨있던 소중한 것을 그만큼 덜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은 무언가 부족하고 불편하던 때의 빈 여백을 어루만지며, 기대와 희망을 노래하는 바로 그 지점에만 피는 작은 풀꽃들이라고 믿는다.

 인각사에서 일연스님을 기리는 행사에 우연히 들렸다가 가슴에 담아온 가르침이 새삼 떠오른다.<생각을 조심하라,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담으려고 무엇을 잃어버리며 사는지 서둘러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나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마음편지 한 줄 부치게 할 쉼표 하나는 꼭 붙들고 성큼 다가온 가을로 걸어가야겠다.


이영철 (화가)

매일신문 문화칼럼
2011년 8월 26일 (금)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8292&yy=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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