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는 신비한 도시-이스탄불 기행
이영철(화가)
프롤로그
역사
터키는 구약 시대부터 로마, 중세 비잔틴제국, 이슬람제국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접점지역으로 수많은 성지 유적과 유물이 쌓인 신비로운 나라다. 현재 터키공화국의 뿌리인 오스만 투루크는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변방 작은 군주국가 오스만 가문을 기반으로 한다. 이 가문이 이슬람 왕조로 약진을 거듭해 동로마 제국을 포함한 동, 남동유럽의 기독교 제국과 맘루크 왕조 등의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제국을 정복하고 마침내 서남아시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전역, 그리고 발칸반도 일대를 지배했다. 그렇게 오스만 투르크는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3개 대륙에 걸쳐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해 500년 가까이 세력을 유지한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편에서 싸운 까닭에 패전국이 되어 급속도로 세력이 약화되다가 마침내 제국의 최후를 목전에 두게 된다. 무너진 대제국은 연합군의 세브르 조약으로 분할되는 굴욕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이때 육군 참모대학 출신으로 1차 대전 당시 눈부신 공을 세운 청년장교 무스타파 케말은 세브르 조약을 전격적으로 거부하고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1920년 앙카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그는 2년간에 걸친 군사직전을 진두지휘해 그리스 점령군을 완전 격퇴시키고 1923년 연합군과 터키 독립을 골자로 하는 로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앙카라를 수도로 한 공화제를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대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터키 공화국의 지도자가 된 무스타파 케말은 재임 기간 중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이념을 골자로 한 이슬람 복장 폐지, 남녀 평등법, 일부일처제, 터키 문자개혁, 여성 선거권 부여 등 이슬람 세계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현재 터키의 중심을 이끌어 나가는 이슬람 세속주의의 주체가 된다. 1934년 터키 정부는 국가를 존폐의 위기에서 구해내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에게 국가의 아버지란 뜻이 담긴 ‘아타튀르크’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수여했다. 터키의 모든 도시에는 동상이 건립되고, 공항, 다리, 주요 기념물에 아타튀르크의 이름이 들어가고, 화폐에도 새겨져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세계적으로 아주 드문 정치인이 되었다.
우리와의 관계
터키공화국은 국토의 3%가 유럽이고 97%는 아시아에 속한다. 인구 8,000만 가운데 90% 이상이 이슬람교도들이라 금주국인 반면, 담배는 엄청나게 피워대는 세계적인 애연국가에 속한다. 국민소득은 15,000 불에 이르지만 빈부의 차이가 극심하다. 우리나라와 시차는 평균 7시간이며, 서머타임이 실시되는 기간에는 평균 6시간의 차이가 난다. 또한 같은 위도에 있기 때문에 사계절이 뚜렷하며, 여름은 고온 건조하고 우기가 겨울이다. 화폐는 유로와 달러, 자국화폐인 리라를 사용한다. 여전히 터키공화국의 주 세력인 투르크 족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고구려와 형제국의 관계를 유지한 돌궐족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동쪽 끝에 있는 이스탄불을 기점으로 끝없이 동으로 이어지는 교역은 앙카라, 카파도키아, 테헤란, 사마르칸트, 우루무치, 돈황, 서안, 웨이하이, 평택, 경주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형성했다. 6·25전쟁 때는 이름도 낯선 머나먼 동북아의 한 나라 자유 수호를 위해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사를 파견하고 피를 흘린 혈맹국이다. 이 인연을 바탕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 3,4위전 때 보여준 승부를 떠난 아름다운 응원은 터키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월드컵 이후부터 일본과 중국으로만 건너오던 유학생들이 대거 한국으로 방향 선회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음식과 기념품
여행의 즐거움 가운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식인데, 터키의 음식은 프랑스 중국과 함께 세계 3대 요리에 손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기본적으로 케밥(kebap)으로 불리는 터키요리는 쌀이나 밀 등의 곡물과 야채로 구성된다. 원재료의 맛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소스나 양념은 상대적으로 적게 쓰인다. 회전구이식으로 만드는 되네르케밥, 진흙항아리에 양고기 등을 넣어 밀봉한 후 익혀 현장에서 뚜껑을 깨트려 담아내는 항아리케밥, 고등어를 튀겨 야채와 함께 바게트 빵에 샌드위치처럼 만든 고등어케밥이 여행객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 아주 달콤한 전통 디저트인 로쿰, 세계적으로 유명한 터키식 아이스크림 돈두르마, 달지 않은 요구르트 아이란, 석류 등 10% 생과일 주스인 메이비 수유, 커피 가루를 용기에 끓여내는 튀르크 카흐베로 불리는 터키식 커피, 밀가루로 만든 달콤한 디저트 바클라바, 터키인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는 홍차 비슷한 전통차 ‘차이’도 터키여행의 묘미를 깊게 해준다. 터키는 천연벌꿀과 견과류 생산지로도 유명한 까닭에 해바라기씨, 호두, 호박씨, 살구, 건포도, 말린 무화과 등이 대표적인 간식거리로 꼽힌다. 또한 터키여행 때 꼭 챙겨야할 기념품은 우선 악마의 눈으로 볼리는 나자르본주우가 있다. 파란색의 눈알 모양으로 된 작은 액세서리로, 이 기념품은 파란색의 눈이 악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카펫, 포도씨로 만든 알콜 40%이상의 전통주 라크, 장미오일도 빼놓을 수 없다.
이스탄불
여행정보
과거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과 현재의 이스탄불은 같은 지역이다. 십자군 원정 때 같은 기독교 군대에 짓밟히고 도시가 불타는 대 혼란기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슬람군에 의해 점령된 후 오늘날까지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슬람군은 율법에 따라 점령국의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념에 맞게 용도변경을 해 사용해왔기 때문에 아야 소피아 성당 등 과거의 유적이 잘 보존된 편이다. 다만 우상숭배를 금지했기 때문에 수많은 비잔틴 벽화나 성화는 회반죽으로 덮이거나 얼굴 부분을 도려낸 채 방치되었다. 그리고 대신 아라베스크 식물문양과 문자그림이 주로 발달했다. 현재 인구 1,300만에 연평균 관광객 4,000만 명이 찾아온다는 고대와 거대라는 수식어가 제대로 어울리는 이스탄불은, 마라마르 해와 보스포러스 해협을 경계로 유럽 이스탄불과 아시아 이스탄불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유럽 이스탄불은 이 두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골든혼이란 만을 사이에 두고 마라마르 해가 내려다보이는 구도심, 보스포러스 해협을 낀 신도심으로 구분된다. 골든혼은 석양 무렵 바다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 구 도심을 이어주는 첫 번째 다리가 갈라타 다리다. 관광객들의 주 이동 동선이자, 흑해와 지중해, 아시아 이스탄불로 가는 페리 선착창이 집결된 곳도 이곳이다. 갈라타 다리 위로 아타튀르크 교 등 추가 건설된 다리들이 골든혼을 가로지르고 있다.
대중교통
이스탄불의 대중교통은 버스와 트램으로 불리는 지상철이 중심이다. 지하철도 2개의 노선이 있지만, 크게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는 도시 전역이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유적지이다 보니, 말 그대로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져 나와 지하철 공사에 난항을 겪기 때문이라 한다. 하바쉬로 불리는 공항 리무진은 아타튀르크 공항에서부터 구도심을 거쳐 신도심의 중심지 탁심광장 까지 이어진다. 트램과 메트로와 유사하나 운행거리가 아주 짧은 튀넬, 일정 인원이 탑승해야만 출발하는 돌무쉬도 특별한 여행의 추억을 도와준다. 갈라타 다리 신도심이 시작되는 지점에 에미뇌뉘 광장이 있는데 이 부근이 이스탄불 교통 요충지다. 유럽으로 가는 기차역, 지중해 전역으로 나가는 해상버스 및 페리들의 선착장, 버스, 메트로, 택시, 트램들도 대부분 이 일대를 거쳐 간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충전식 교통카드인 아크빌이나, 1회용 토큰인 제톤을 사용한다. 이스탄불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주의할 점은 이 도시는 교통체증이 심하고 택시요금도 높은 기름 값의 영향으로 아주 비싸다. 버스, 트램, 메트로 등도 우리나라와 달리 환승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지간한 거리는 작정하고 걸어 다니며 여행을 즐겨야지 그렇지 않으면 짧은 거리라도 탈 때마다 요금을 지불해야 하니 의외로 교통비가 많이 든다. 화장실도 공중화장실은 1리라, 환율로 계산하면 600원 정도의 유료가 대부분이다. 다만 식당 화장실은 무료이니, 식당을 찾을 때는 반드시 화장실을 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유럽 이스탄불-구도심
톱카프 왕궁(Topkapi palace)
1453년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점령한 후 성 소피아 사원 바로 뒤, 마라마르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건설한 이 왕궁은 15C경부터 400여 년 동안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던 14명의 황제들이 거주했다. 고전적인 오스만 풍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왕궁은 1856년 신도심 보스포러스 해변에 돌마바흐체 궁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이스탄불 최대의 정치, 문화 중심지였다. 터키어로 톱(Top)은 대포, 카프(kapi)는 문을 의미하는데, 옛날 이 궁전 문 앞에 커다란 대포가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전체 면적 21만평, 5km에 이르는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톱카프 왕궁은 4개의 문과 거기에 부속된 4개의 정원을 기지고 있다. 첫 번째 문인 ‘황제의 문’(술탄의 문)은 1478년 세워졌는데, 이 문을 지나면 근위병들의 주둔지이자 일반 백성들의 출입이 허용된 제1정원이 있다. 두 번째 ‘경건의 문’ 부터는 일반 백성의 출입이 금지된다. 문 양쪽에 방추형 석탑이 있으며, 문 오른쪽에는 사형집행자들이 손과 칼을 씻었다는 우물이 있다. 경건의 문 안쪽 제2정원인 의회의 정원은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다완’으로 불리는 건물이 있다. 다완은 내각을 뜻하는데, 당시 중요한 업무는 이곳에서 논의 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 문은 황제의 측근들만이 통과할 수 있었다. 이 문 뒤에서 술탄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외국사절단을 접견하는 방이 있다. 술탄의 여인들이 거처하던 하렘(Harem)도 제3의 장원 안에 있다. 아라비아어로 ‘하람’(성역)과 ‘하림’(금지하다)을 어원으로 하는 하렘은 400여개의 방에 13~14세 소녀 약 500명이 있었다고 한다. 하렘은 남성금지구역이다. 술탄을 제외하면 이집트에서 데려와 경비업무를 맡은 흑인 환관만이 있었다. 환관이 흑인인 이유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핏줄의 출처를 단번에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술탄은 공식적으로 4명의 부인을 소유하고, 첩의 수는 제한이 없었다. 하렘 맞은편 정원의 오른쪽 건물이 술탄의 요리실인 마흐바트 아미레다. 매일 5,000명 분의 식사를 만드느라 16C 말에는 1,200명의 요리사가 상주했다고 하니 제국을 호령하던 왕궁의 위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3의 정원 건물들은 현재 보석박물관, 무기박물관으로 탈바꿈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보석박물관에는 190여점의 보석이 4개 전시관에 주제별로 나뉘어 전시되고 있으며, 오스만 제국시절부터 외부 침략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이스탄불의 영광과 위엄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스푼 방으로 불리는 곳에 전시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86캐럿 대형 다이아몬드는 49개의 작은 다이아몬드에 둘러싸여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스푼방의 유래는 한 어부가 이 다이아 원석을 주워 그 가치를 몰라보고 시장에서 숟가락 3개와 바꿨기 때문이라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이 밖에도 톱카프를 유명하게 만들어 주는 전시물은 중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도자가가 있는데, 1만 2천점 가운데 3,000여점만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네 번째 문은 제4의 정원으로 연결된다. 이곳에서는 마라마르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우측 멀리 보스포러스 해협과 아시아 이스탄불, 그리고 좌측으로는 신도심과 갈라타 다리가 아름다운 풍경화로 펼쳐져 있다. 톱카프 궁 왼쪽에는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등 고대문명과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고고학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박물관을 둘러보노라면 왜 사람들이 유럽여행은 이스탄불부터 시작해서 유럽 전역을 보거나, 혹은 유럽 전역을 둘러본 후 반드시 이스탄불을 들러 마무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아야 소피아(Ayasofya) 성당
톱카프 궁전 바로 뒤에는 터키인들이 아야소피아라고 부르는 성 소피아성당이 있다. 현재 정식 명칭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이다. 비잔틴 미술의 극치를 보여준 이 성당은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 때 세워졌다가 화재로 크게 소실된 후,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인 532년부터 5년에 걸친 개축공사를 통해 현재모습의 대성당이 완공되었다. ‘성스러운 예지’란 뜻이 담긴 이 성당은 로마에 성 베드로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레바논 바르베크의 아폴로 신전에서 운반해 온 기둥과,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석재들을 이용해 건설되었는데, 특히 기둥하나 없이 벽돌을 이어 붙여 천체를 의미하는 거대한 돔 형식을 건축한 기술력은 현재까지도 불가사의로 남아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는 그리스 정교의 본산지로 자리매김 된 성당이었으나 그 후 오스만제국에 복속되면서 이술람 사원으로 개축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름다운 비잔틴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반죽으로 덮이고, 그 위에 이슬람식 아라베스크 문양들과 코란의 금문자 미나레가 장식되었다. 사원 내부 통로를 이용해 이층으로 올라가면 황제 상과 성모자 상 등 9세기 이후에 그려진 아름다운 모자이크 화를 감상할 수 있다. 1차 대전 패전과 함께 왕조가 몰락하자 연합군의 강력한 요청으로 회반죽을 벗겨내고, 다시 옛 성화 복원작업이 진행되다가, 현재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이슬람 문화와 기독교 예술이 공존하는 박물관으로 변모해 수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블루모스크(Blue Mosque)
아야소피아와 마주보고 서 있는 거대한 사원이 블루모스크다. 이곳은 술탄들의 예배장소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이슬람교도들이 하루 5번의 예배를 드리는 시간 이외에는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공개되고 있다. 술탄 아흐멧 1세는 1616년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아야소피아를 능가하는 터키에서 가장 아름답게 오스만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원 건축을 명했다. 이슬람 세계의 우위를 상징하고자 했던 이 모스크는 아야소피아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했는데, 결과적으로 아야 소피아보다 1,000년이나 더 지나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술력 부족으로 수많은 기둥이 떠받치는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곳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첨탑이 6개 있는 모스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둥근 돔에는 260개 이상의 작은 창문들이 있으며, 스테인드글래스로 장식된 이 창문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내부 공간을 더욱 신비롭게 해준다.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라 삶 자체인 터키인들에게 이 사원이 지닌 성스러운 의미는 상상을 초월하고, 늘 인신인해를 이루는 관광객들에게는 이슬람의 신비로움과 위엄을 새삼 실감하게 해주는 곳이다. 기둥이 지탱하는 내벽과 기둥은 푸른색을 주조로 하는 2만장의 타일로 장식했기 때문에 블루모스크란 이름을 얻었다. 블루모스크 바로 옆이 술탄 아흐멧 광장인데, 과거 로마사대에는 전차 경기장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퇴적층이 높아져 이집트에서 가져온 석주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블루모스크의 옆 마당 같은 아담한 광장이 되었다.
지하궁전 예례바탄(Yerebatan Sarayi)
아야 소피아 성당 좌측으로 길 하나만 건너면 이스탄불의 지하궁전을 만나게 된다. 역시 비잔틴제국 유스티아누스 대제 때 건설된 것으로 길이 143m, 폭 65m, 높이 9m의 웅장한 지하 저수조는 7,000명의 노예가 동원되어 건설되었다고 전해져온다. 늘 전쟁터였던 이스탄불은 안정적인 물 공급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이 지하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지하궁전으로 불리게 된 것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돌기둥 때문이었다.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336개의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들은 각지의 신전에서 운반해 온 것들이다. 1885년 복원공사를 거쳐 여행객을 위한 보도를 만들고 조명, 음향시설 등을 설치했는데, 이 시기에 거꾸로 놓인 메두사의 머리가 발견되었다. 메두사가 거꾸로 놓인 이유는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어버린다는 신화 때문이다. 지하궁전은 물 저장과 함께 물고기들을 길렀는데, 이것은 외부의 적이 물에 독을 타는 것을 사전에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지금은 관광지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소량의 물을 저수하고 물고기 역시 관상용으로 기르고 있다.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
아야소피아 광장에서 보면 우측 아래가 지하궁전이고, 정면이 술탄 아흐멧 광장을 옆에 끼고 있는 블루모스크다. 그리고 지하궁전과 아흐멧 광장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우측에 그랜드 바자르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터키 현지 이름으로 ‘카팔르차르쉬’ 즉 지붕이 있는 시장 이란 의미다. 그랜드 바자르는 옛 실크로드의 서쪽 종점이었다. 과거에는 노예, 보석 등 가리는 것 없이 거래가 되었다고 하는데, 토산품 가게들이 밀집해 있는 지금은 4,500여개의 점포와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만 해도 20개가 넘는다. 예로부터 사원을 찾아오는 수많은 신도들 때문에 주변에는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고, 사원은 이 시장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랜드 바자르는 크게 시장 외부와, 시장 내부로 나뉘는데 세월과 더불어 점점 커지고 거대해져 지금은 내부 바자르가 31,000제곱미터에 천장은 수백 개의 유리창이 있으며 높이가 30m에 이르고, 그 밖으로 외부 바자르가 끝이 없을 듯이 확장되어 그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내부로 들어가는 대표적인 문은 동쪽의 누로스마니예 게이트, 서쪽의 베야짓 게이트가 대표적이다. 시장 안에서 길을 잃게 되더라도 이 두 문 가운데 하나를 물어보면 탈출(?)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동서가 만나는 첫 지점이던 이곳은 수많은 물품들이 교역대상이 된 중근동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바자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젠 시장이라기보다는 터키식 세라믹, 타일, 그릇, 악기, 조명등, 카펫 같은 토산품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귀금속 상점이 밀집한 기념품 집신지 혹은 그 자체로도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랜드 바자르 관광과 쇼핑 때 주의할 점은 이곳은 대부분 가격표가 없고, 대게 손님을 보고 직관적으로 가격을 부른다는 점이다. 따라서 바가지요금이 10~100배에 이르는 곳이니, 물건을 구입할 때 조급함은 금물이다. 비싸다고 돌아서면 거의 대부분 손님을 붙잡기 때문이다.
이집시안 바자르(Egyptian Bazaar)와 예니자미(Yeni Gamii) 사원
톱카프 왕궁과 성소피아 사원, 블루모스크는 구도심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랜드 바자르는 이 주변에서 시작해 골든혼 가까운 언덕 아래까지 확산되어 있다. 그리고 그랜드 바자르의 끝 부분, 즉 골든혼 만이 보이는 해안 까지 내려오면 다시 규모가 큰 예미자니 사원과 바로 그 사원 옆에 있는 이집시안 바자르를 만나게 된다. 구도심 위쪽 사원과 시장에는 관광객들이 집중된 곳인 반면, 이곳은 관광객과 더불어 이슬람교도들이 많이 찾아온다. 이집시안 바자르는 원래 이집트에서 건너온 많은 향신료를 만날 수 있는 시장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 바자르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예니자미를 유지하기 위해 지어졌다. 그랜드 바자르와는 달리 현지 손님들도 많이 찾아오는 곳으로 바가지요금도 상대적으로 적다. 식품, 생활용품, 약초, 과일, 치즈, 터키 전통과자인 로쿰, 열매, 등을 판매했고 최근에는 토산품, 귀금속가게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에미뇌뉘 광장(Eminonu Square)과 갈라타 다리(Galata Bridge)
이집시안 바자르 바로 옆에는 구도심의 끝이자 이스탄불 최대 교통요충지인 에미뇌뉘 광장이 있다. 이 광장 주변을 중심으로 골든혼을 끼고 버스 정류장, 유럽으로 가는 기차역, 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라마르 해, 아시아 이스탄불, 흑해, 지중해를 오가는 페리, 해상버스 선착장이 밀집해 있다. 트램을 비롯한 택시, 버스, 메트로 등 대부분의 교통수단이 이 일대를 거쳐 간다고 보면 된다. 신도심으로 건너가는 첫 번째 다리인 갈라타교 역시 광장 앞에서 시작된다.여행객들의 미각을 아주 착한 가격에 사로잡는 고등어케밥도 바로 이 광장 앞 선착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유럽 이스탄불-신도심
탁심 광장(Taksim Square)과 게지공원(Gezi Park)
신도심은 상공업 특구로 지정, 개발된 신시가지로 언덕 위 탁심 광장에서 시작되어 해안과 내륙으로 방사상으로 펼쳐져있다. 탁심은 분배, 나눔이란 의미의 아랍어 ‘타크심’ 으로부터 왔다. 오스만제국 17c 술탄인 아흐멧 1세 시대부터 도시 북쪽에서 발원한 물줄기를 끌어와 광장 부근에 저장한 후 도시 전역에 공급을 했다, 현재 이 물 저장고는 도시가 현대화되며 그 기능을 다 하고 지금은 공화국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탁심은 구도심의 에미뇌뉘 광장처럼 신도심의 메트로, 공항리무진, 택시 등 교통이 집중되는 곳인데 드넓은 광장 덕분에 집회, 시위 장소로도 자주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 서울의 광화문 정도의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이 광장 중앙에는 터키공화국 수립 5주년을 기념해 조각가 피에트로 카노나카가 1928년 제작한 공화국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이름을 딴 아타튀르크 문화회관이 있다.
탁심 광장 바로 뒤가 신도심 유일한 녹지인 게지공원으로 아베크족과 집시, 시민들의 쉼터다.
그런데 지난 5월 26일 50여명의 환경 보호주의자들이 시작한 작은 집회가 터키 전역을 시끄럽게 한 반정부 투쟁으로 확산된 현장이기도 하다. 시당국은 이 공원을 밀어내고 1940년 철거된 군부대청사를 재건축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속사정은 이곳에 대형 쇼핑몰을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스탄불 안에만 이미 92개의 쇼핑몰이 있는데다가 공원의 나무가 사라질 위기에 놓이게 되었으니 환경 보호주의자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게다가 시공자가 현 집권당인 자유개발당(AKP)을 후원하는 기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위는 설득력을 더했다. 문제가 커진 것은 시 당국이 강경진압을 하며 부상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SNS를 타고 번지면서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현 총리 에르도안은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의 정신을 계승해 2001년 자유개발당을 창당하고 총리가 된 후 3선에 성공하는 동안 1인당 국민소득을 3배로 늘리고 교육예산도 대폭 증액했으며, 무엇보다 235억 달러에 달하던 부채를 9억 달러 수준으로 줄였다. 동서이스탄불 3번째 교량 착공, 아시아 이스탄불에 거대한 모스크 건축, 290억 달러를 들인 세계 최대 규모 국제공항 착공 등 그의 정책은 터보엔진을 달았다. 그러나 주류 판매 통제, 군인, 학자, 언론인들을 대중선동협의로 체포하는 등 독제자의 모습도 보였다. 케밥을 얻고 대신 자유를 잃은 국민들의 불만은 늘 불씨로 남았다. 게다가 아타튀르크 이후 현 총리에 이르기 까지 터키를 이끈 정치 지도자들의 의지는 ‘선진터키’가 아니라 ‘강한터키’에 기울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유럽 국기들과는 달리 출산장려책을 펼쳐 현재 터키 인구의 60%가 35세 미만이라 한다. 그리고 이 점은 터키가 EU에 가입하지 못하는 잠재적인 이유가운데 하나란 것이 정설이다. 대부분 기독교 국가인 유럽연합이 이슬람종교를 가진, 상대적으로 가난한 터키 젊은이들이 터키가 EU에 가입되는 순간부터 무비자로 유럽 전역에 쏟아져 들어오는 일은 당연히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부차가 심화된 터키는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 가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불만일 수밖에 없고, 게지공원 사태는 더 개발하려는 부자와 조금이라도 지키려는 가난한자의 대립이 정부와 시민의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현재는 정부가 한발 물러선 상태로 지난 5월 이후 불만의 여름을 건너온 불안한 평화가 이어지고 잇다.
이스티클랄 거리(Istiklal Avenue)와 갈라타 탑(Galata Tower)
탁심 광장에서 시작해 구도심으로 건너가는 갈라타 다리로 내려가는 길이 우리나라 명동 비숫한 이스티클랄이다. 이곳에는 인터콘티넨탈 호텔, 리츠칼튼 호텔, 등 유명 숙박업소와 백화점, 서점, 대형은행, 유명 의류브랜드, 고급식당, 극장, 귀금속 가게 들이 밀집해있는 현재 이스탄불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다. 청소차가 다니는 이른 오전 시간을 제외하면 이 거리는 밤과 낯을 가리지 않고 쇼핑과 산책을 즐기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거리의 악사들이 끊임없이 노래하고, 이 거리의 명물인 트램이 경적을 울리며 여행객들의 낭만과 추억을 싣고 한가로이 튀넬과 탁심 사이를 오르내린다. 낮부터 밤을 지나 새벽에 이르기 까지 이 활기찬 거리를 걸으며 수많은 인종과 저마다의 언어들로 쏟아내는 행복한 지저귐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이 있음에 대한 엄청난 활력을 준다. 또한 이스티클랄 사이사이로 이어진 골목에 들어선 기념품과 먹거리 가게들이 관광객들의 지감을 저절로 열게 하는 또 다른 행복을 선사한다.
이 거리 끝 지점 에는 이스탄불의 또 다른 명물로 언덕 아래까지만 내려가는 아주 짧은 코스의 메트로인 튀넬 역이 나온다. 이 메트로 입구를 따라 돌아서 이스티클랄 다음 블록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테레테(TRT)라 불리는 방송국이 보인다. 그리고 이 방송국 앞 주차장 바로 옆 아주 오래된 건물이 바로 유명한 영국 추리소설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을 집필한 페라 팰리스 호텔이다. 그녀는 파리에서 출발해 뮌헨, 비엔나, 부다페스트를 거쳐 종착역 이스탄불로 오는 오리엔트 특급열차 안에서 영감을 얻어 페라 팰리스 호텔에 짐을 푼 후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녀가 집필실로 쓴 그 방은 지금도 애거서 크리스티 기념 전시관으로 남겨져 있다. 이 호텔은 그녀뿐만 아니라 첩보원 마타하리, 그리고 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도 묵어간 유서 깊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다시 이스티클랄로 돌아서 나오면 거리의 끝 경사로가 급해지는 지점부터는 악기 전문점들이 늘어서 있고, 그 중간쯤에 갈라타 탑이 있다. 갈라타 탑은 원래 소방탑으로 건설되었는데 지금은 내부에 엘리베이터 시설을 해 관광용 전망대로 사용 중이다. 갈라타 탑 위에 오르면 바로 아래 갈라타 다리가 보이고, 구도심 전역과 골든혼, 멀리 마라마르해와 보스포러스 해변은 물론 아시아 이스탄불의 모습도 장엄한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
탁심 광장 뒤 게지공원을 지나 이스티클랄과 정반대 길로 내려가 보스포러스 해안에 이르면 돌마바흐체 궁전을 만나게 된다. 보스포러스 해안을 간척해 메운 위에 세워진 이 궁전은 그래서 ‘모든 것이 가득 찬 정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구도심의 중심인 톱카프 궁이 유목민의 피를 이어받은 오스만 투르크족의 전통을 계승한 반면, 돌마바흐체는 화려함에 치중한 유럽풍의 궁전이다. 보스포러스 해협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건물이 바다위에 떠있는 듯해서 ‘바다위의 궁전’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이 자리는 정복자 아흐멧 군대가 당시 콘스탄티노플이던 이 도시를 점령할 때 처음 닻을 내린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술탄 아흐멧 1세는 이곳 포구를 메워 목조로 베숴타쉬 궁을 건립했는데, 1,800년대 초 대화재로 소실되고, 그 자리에 다시 술탄 압돌 마사드 1세가 오늘날 모습의 돌마바흐체를 지었다. 1843년부터 1856년까지 13년이 소요된, 잘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지은 이 궁전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을 벤처마킹 해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오스만 제국 후기 6명의 술탄이 사용한 곳이다. 궁전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유럽에서 보내온 수많은 진상품들도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43개의 홀과 285개의 방을 치장하는데 금 14톤, 은 40톤이 들어갔다. 각 방들은 강렬한 색감으로 치장되고, 36개의 크리스탈 샹들리에와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카펫, 커튼, 좌석커버 등은 터키제이며 샹들리에는 유럽에서 주문 헀고, 일부는 외국 왕실에서 사 보낸 선물이다. 이 궁전의 하렘은 건물의 뒤쪽을 차지하고 있으며, 홀과 방, 복도는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1,400여개에 이르는 창문, 특히 술탄의 대관식과 대규모 연회장으로 쓰인 중앙 홀은 돔의 높이만 해도 36m나 되고, 2,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5대규모라 한다. 특히 이곳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기증한 무게 4.5톤에 이르고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있다. 오스만 제국의 번영과 서구화를 갈구했던 술탄 압둘 마사드의 의지도 충분히 느껴지지만, 이 궁전을 짓고 장식하느라 재정낭비가 심해 제국이 흔들릴 지경이었다는 것에 더 큰 공감이 간다.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의 화려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름 없는 백성들이 흘렸을 피와 땀, 그리고 탄식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역사를 만들어 온 인간 욕망의 허망함은 늘 시간이 잘 말해주고 있다. 터키공화국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1938년 11월 10일 이곳에서 서거했는데, 그가 서거한 집무실 시계는 여전히 그가 사망한 9시 5분에 멈춰져 있다.
아시아 이스탄불
카드쾨이와 하이다르파샤역
유럽 이스탄불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아시아 이스탄불 여행지로 우선적으로 꼽는 곳이 카드쾨이로 불리는 선착장이다. 구도심 에미뇌뉘 선착장에서 출발해 20분 정도 달리면 제일 먼저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트램을 타고 아름다운 주택가를 일주하거나,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도 아시아 이스탄불 여행의 묘미를 더해준다. 하이다르파샤 역은 건물의 외관과 내부가 모두 궁전 풍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역사가 유명하다, 이곳은 바그다드 철도노선이 시작되는 역이어서, 아시아로 떠나는 유럽인이나, 유럽으로 들어오는 아시아인들의 꿈과 희망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에피소드
군화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을 자주 겪게 되는데, 따지고 보면 바로 그 자체가 여행의 중요한 부분이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일수록 아주 오지가 아니라면 오히려 출발지의 짐을 줄인다. 필요한 것은 여행을 다니며 사서 쓰면 된다. 여행지에서 사서 사용하다 가지고 돌아오면 그 자체가 모두 추억과 사연이 서린 기념품이 되기 때문에 배낭을 가볍게 출발하는 것이 지혜롭다. 첫 번째 이스탄불 여행의 유일한 실패는 바로 신발이었다. 평소 그림 그리는 시간 외에는 비포장 길을 따라 사진을 많이 찍으러 다니는 필자는, 평소 습관대로 목을 날린 군화를 신고 나갔다. 그런데 모든 곳이 낯선 도시로의 여행은 당연히 평소의 10배 정도는 걷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간과했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온통 등산로나 다름없는 언덕길을 수도 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이스탄불 탐색 일정 때문에 단 하루 만에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것이다. 무슨 군대 행군도 아니고.. 발에 붕대를 감고 응급처치를 한 후 보고 싶은 것은 모조리 보러 다니긴 했지만, 고난도 여행의 일부로 기뻐하기엔 현실이 참 고통스러웠다. 이스탄불 여행은 가죽신발이나 딱딱한 등산화보다는 가벼운 워킹화를 추천한다.
구두닦이 청년
갈라타 탑 근처 골목을 지나가는데 저만치 앉아있던 구두닦이 청년이 갑자기 짐을 챙기더니 자리를 떴다. 그런데 커다란 구두 솔을 떨어뜨린 채 모르고 걸어가고 있었다. 친절하고 착한 동양인 화가가 그것을 그냥보고 지나칠 수 없어서 얼른 주워 주인을 불러 전해주었다. 감사의 인사가 되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친구는 너무 고맙다며 굳이 군화를 닦아주겠단다. 거절도 너무 지나치면 호의에 대한 상처가 될 것 같아서 결국 한 발을 내밀었고, 그 젊은이는 왁스를 잔뜩 발라 먼지가 뽀얗게 앉은 구두 한쪽을 말끔하게 닦아주었다. 그리고 끝! 나는 다른 신발도 마저 닦아달라고 무심코 발을 내밀었다. 역시 순식간에 균형을 맞춰주더니 이 친구 돈을 달란다. 아니...고마워서 닦아준다며? 그러자 이 친구의 주장이 걸작이었다. 한쪽 신발은 고마워서 닦아 준 것 맞는데, 나머지 신발은 당신이 닦아달라고 스스로 요구를 했으니 자신은 정당하게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낯선 여행자가 거기서 다퉈봐야 일만 커질게 뻔해서 돈을 건네주었다. 다만 속으로 당했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사람의 호의를 역이용해서라도 푼돈을 챙겨야 하는 그 절박함이 싫었다. 아...군화 때문에 발바닥 다 터지고, 다시 군화 때문에 속도 터지고, 이래저래 이스탄불 여행에서 군화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골든혼의 식당
이스탄불은 세계적인 관광지다 보니 곳곳에 바가지요금이 여행객의 상처를 주고 있는데, 골든혼 아름다운 선착장을 따라 늘어선 고급 식당들도 주의가 필요하다. 단체여행의 경우 가이드나 리무진 운전수가 소개하는 특별 식당도 방심은 금물이다. 우선 메뉴판이 나오면 자신이 시킨 음식과 가격을 정확히 체크해야 한다. 그리고 시키지 않은 음식이 나오면 바로 물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심코 서비스인줄 알고 먹을 경우 상상을 초월하는 요금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먹은 것은 안 시켰다고 해봐야 억지스럽고, 그 사실을 논리적으로 유창하게 항의하고 설득시키기에는 대부분 여행객의 터키어 실력으로는 애초부터 무리란 것 까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메뉴판 역시 특히 젊은 웨이터가 서빙을 하는 경우 제일 비싼 요리가 든 것을 제시하고, 그것을 거부하면 중간가격, 그리고 그것마저 거부하면 싼 가격의, 총 3종류의 메뉴판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물건이든 음식이든 사람 봐 가며 팔아치우려는 상술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비슷해 보였다.
길고양이
이스탄불은 길고양이들의 천국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길냥이들에게 밥을 주는 것을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하는 사람도 많다. 왠지 재수 없는 동물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길고양이들은 도둑고양이 취급을 받고, 사람들이 멀리하게 때문에, 그들 스스로도 사람을 보면 경계하거나 도망을 간다. 그러나 이 도시는 어느 식당이나 공원을 가도 사람들이 찾아서 밥을 주고 사랑하기 때문에 냥이들 스스로 사람인줄 알고 거리를 버젓이 활보한다. 재래시장 한 모퉁이에 깃들어 어린 냥이들에게 몰래 사료를 먹이고 있는 필자는 길고양이들과 인연이 되면서부터 인연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눈을 떴다. 그래서 길냥이들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돌보는 이스탄불이 더욱 특별하고 따뜻한 도시로 가슴에 남아있다.
에필로그
여행을 마치며 짐 정리를 하다 보니 벗들에게 전해줄 기념품에서부터 영수증 한 장까지도 모두가 소중하다. 다시 아타튀르크 공항으로 들어가 출국수속을 마치고 아시아나 항공기에 탑승해 창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골든혼과 이스탄불을 내려다보니, 비로소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그렇다. 이 세상 모든 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을 때, 더욱 따뜻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곳에는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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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영철은 국립 안동대학교와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16회의 초대 개인전과 200여회의 국내외 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에세이집 <그린 꽃은 시들지 않는다>를 출간하고 혜민스님 잠언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표지 및 본문 그림을 그렸다. 2013년 경주·이스탄불 문화엑스포 행사의 한·터 예술합동 교류전 큐레이터로 지난 5월과 9월 두 차례 이스탄불을 여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