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주년- 화가 이인성(李仁星)

대구문화재단 예술담론 계간지 <대문> 2012년 봄호 / 캐리커처 에세이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은 시공간이 겹치는 인연이 전제되어야 하는 귀한 것이다. 물론 들어오는 것은 언젠가는 넘치게 마련이다. 현대인들의 화두도 대부분 결핍보다는 과잉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려있다. 버리라는 충고와 비우는 것이 더 윗길이라는 이정표도 만난다. 그러나 버림과 비움은 왠지  길든 짧든 나와 함께 한 사람과 사물간의 교감과 사랑이 지워진 무채색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온 것이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할 때 <보냄>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함께 나눈 시간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손 흔들어 줄 수 있는 삶, 거기에는 시대와 생생한 현실에 대한 참다운 작가적 반응도 있다고 믿는다. 물론 보낸 것은 시간의 강물을 따라 의식의 심연으로 침전이 되어 기억과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나와의 상관관계를 형성하게 되어 개개인 의식의 수면위로 다시 떠오르게 된다. 지나간 모든 것이 늘 생생한 현재가 되는 지점이다.

 2012년을 시간여행 중에 있는, 대구와 이인성화가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1912>와<100>이란 숫자도 이런 소중한 현재를 경험하게 한다. 화가 이인성은 6․25란 민족사의 비극에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바로 지금 우리들의 시간 언저리까지도 생생한 인생과 예술의 흔적을 남겨두었을 인물이다. 남산동 재래시장 상가 한 모퉁이 작업실에 수년째 깃들어 있는 필자는 자주 근대사의 추억이 남아있는 계산성당과 제일교회, 청라언덕을 거쳐 종로를 지나 수창초등학교 일대를 어슬렁거리곤 한다. 어떤 날은 진골목을 따라 약전골목을 돌아 나와 반월당과 방천시장을 지나 신천 변을 배회한다. 비록 공간만 겹칠 뿐이지만 어긋난 시간의 인연을 상상력의 실에다 존경과 그리움을 담아 꿰매고 나면 열정을 가득 품은 청년 이인성이 걸어 나오고 고단한 민족사의 현실을 염려하는 이상화의 탄식소리도 들린다. 애틋한 연심으로 백합 같은 소녀를 그리던 박태준도 불러내고, 통키타를 두드리는 김광석의 노래도 듣는다.

 아마 이들과 모두 시공간이 온전하게 겹치는 인연으로 만났더라면 분명 형님 아우가 되어 남산동 훈훈한 대폿집에 모여들어 탁주사발 가득 넘치는 시정과 함께 폭풍처럼 휘갈기는 영혼의 붓질 속으로 어깨동갑하며 달려갔을 것이다. 특히 화가 이인성이 토해내는 청보라빛 하늘과 검붉은 대지와 사람들...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양분 삼아 노랑과 초록을 입고 춤을 추는 초목들의 노래를 질리도록 듣고 또 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 혹은 야수파적 기질이라도 괜찮다. 화가 이인성이 근대화단의 중심에서 불러댄 절창은 탄생 100주년이란 숫자를 대하는 지금도 우리를 긍지와 자부심으로 따듯하게 해주니 말이다.

 1950년 11월 어느 날 서울 북아현동 주택가에서 터진 한 발의 총성은 이제 역사의 물살을 거슬러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조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은 그리움의 능선을 넘어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협곡도 지나, 인간과 예술의 의미가 진정 무엇인지 되물어 온다. 근대를 포함한 과거는 버리거나 내려놓아야 할 짐짝이 아니다. 오늘도 천재에 대한 경의와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퍼 올려 남산동 화실 낡은 시간의 벽을 벅벅 긁어서<화가 이인성>이라고 쓴다. 그리고 역사의 다음 페이지 어느 모퉁이에서 이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이름을 받아 적을 또 다른 이가 누구일지 상상해본다.


이영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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