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불상이 준 교훈


공부를 하든 여행을 가든 그 목표가 내가 있는 곳에서 멀고 높은 곳일수록 더 소중하고 가치 있으리라는 이상한 편견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문화유적지 답사에 몰두해 있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남도의 끝에서 강원도 골짜기와 서해의 변두리까지 적지 않은 거리를 참 열심히도 돌아 다녔었고, 멀리 다녀온 만큼 얻은 것도 적지 않아 나의 편견은 신념처럼 굳어져갔다.

그런 나의 사고를 송두리째 뒤엎게 된 계기는 지방신문 한 구석에 난 짤막한 기사였는데, 야산에 방치되어 있던 고려시대 작은 석불상을 도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전율을 느낀 것은 그 석불의 소재지가 내가 자라온 고향에서 불과 십리도 되지 않은 이웃마을이었는데도 그 존재의 기억이 내겐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기묘한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시간을 쪼개 달려가 보니, 눈에 익을 대로 익은 그 마을 뒷산의 참으로 무심하게 지나쳐오던 평범한 골짜기 밭 한가운데에 코가 뜯겨  나가고 얼굴 윤곽도 이미 희미해진 어린애 키만한 석불상이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었다.

심한 부끄러움을 애써 감추고 찬찬히 뜯어본 그 석불은 내가 그동안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만나본 어떤 부처보다도 아름답고 친밀하며 감동적이었다.

그날 내 삶의 많은 부분이 선명해졌다. 내 주변 가까운 곳에 널려있는 소중한 것들을 등한시하고 예술을 한답시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떠다니던 내가 보였고, 소흘 하게 지나친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였던 수많은 일상의 조각들이 보석처럼 내 가슴 속 깊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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