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관한 단상


애야 멀리 가지마라...

길을 잃을 거야.

산에는 여우가 있어서 어린아이를 잡아 간만 파먹고 엎어놓는단다.

길에는 엿장수 아저씨가 너를 아들이라며 데리고 멀리 멀리

다시는 못 올 곳으로 가버릴지도 몰라.

사실 넌 다리에서 주워온 아이란다...


신비주의와 출생의 비밀까지 희화적으로 뒤섞인 유년시절 어머니의 훈육은

어린 자식이 함부로 아무 곳이나 다니다 다치기라도 할까봐 염려해서

미리미리 공포심으로 행동반경을 제한하려는 보편적인 정서가 여과 없이 담겨있었다.

형이 진짜 부모를 만나겠다고 엿장수를 따라가다 되돌아온 후유증 외엔

대체로 해지기 전 까지 동네 안에서만 놀게 하려던 어머니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정말 궁금했다.

동구 밖 저 다리를 건너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어떤 세상이 있는지.

들 지나 산 너머 또 넘어 가면 무슨 나라가 있는지.

마당에서, 골목에서, 형들이 다니던 학교 운동장에서 지치도록 뛰고 놀아도

내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동네를 둘러싼 산들의 스카이라인을 더듬거나

뽀얀 먼지 날리는 신작로 끝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여름 날 나는 드디어 길을 따라 걸었다.

미지의 것에 대한 교육된 두려움은 결국 새순 돋듯 자라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논일을 하다 의아스러운 듯 바라보던 동네 아저씨의 시선을 무시하고

쿵쾅거리는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 머뭇머뭇 산모퉁이를 돌아 걸을 땐

심장이 터지는 듯 했다.

그것이 내 삶의 최초의 가출이었다.

해가지고 울면서 되돌아오던 나를 향해 넋 나간 듯 달려오시던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이 또렷하게 각인되던 기억으로 나의 일탈은 일막을 내렸지만

그 사건 이후 나의 행동반경은 개울건너 들로 산으로 엄청 확장되었다...

겨우 다섯 살 팔 개월 아이 눈에도 내 동네 너머 다른 세상이 보였다.

물론 그 후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가출기질은

지금도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늘 두려움을 제압하는 궁금증이 나를 어디론가 이끌어가고 있다.

짐을 꾸릴 때 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다.



애야

멀리 가지마라

길을 잃을 거야...


그러니 이제 날이 저문다고 울며 발걸음을 되돌리지 않을 만큼 커버린 나는 말한다.


어머니...

누군가가 만든 길 끝까지 가서

더 이상 길이 없어 잃을 길도 없는 곳  까지 가서

새 길 한 뼘은 만들고 떠나야지요

그래야 누군가가  또 예술을 하겠다고 가출했다가

나로 인해 한걸음이라도 편히 걷지요...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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