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나는 책에 대한 소유욕이 남다른 편이어서 늘 일반 서적에 비해 턱없이 비싸지만 마음을 사로잡는 전문 서적 때문에 애태운 적이 많았다. 그래서 전시회를 통해 작은 수입이라도 생기면 만사 제쳐두고 책부터 사 모았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책을 사 모으다보니 책 속으로의 여행을 통해 의식을 확장시킨 만족감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책이 좋을 수만은 없었던 것은 이사할 때면 느끼는 엄청난 부담감 때문이다. 그냥 사람을 동원해서 한꺼번에 옮겨버리면 산더미처럼 쌓인 책을 다시 분류를 하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래서 책만큼은 직접 날라 정리를 한다. 이 일은 책 무게도 엄청나지만 바쁜 일정이 겹치기라도 하면 말 그대로 고행에 다름 아니다.

이때가 책을 많이 산 것을 갈등하는 유일한 시기다. 그리고 생각한다. 만약 아주 급작스럽게 먼 곳으로 장기간 떠나야 하고, 전혀 책을 들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과연  마음속 깊이 안고 가야할 진정한 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저들 속에 담긴 지식을 알고 모름의 문제는 아니라 책들 가운데 내 삶의 가치관을 형성시킨 결정적인 열쇠가 어디에 숨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물욕과 소유욕으로 채워진 지난날을 슬그머니 후회하기 시작 한다.

어느 날엔가는 갑자기 여유가 생겨 허기진 듯 사들인 많은 책들...그래서 바삐 들춰보느라 햇빛 한번 겨우 보고 닫혔을 수많은 페이지들이 떠오르고, 그 후 새로운 책들에게 밀려나 책장 어두운 곳에서 먼지만 켜켜이 쌓인 저들이 존재의미를 상실한 책은 그저 종이더미일 뿐이라는 아우성도 들린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그 긴 시간과 돈, 정열을 바쳐가며 무엇을 모았다는 말인가? 인식의 촉수가 그 지점까지 뻗어나갈 즈음이면 책 무게까지 실린 진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인생도 그러하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을 확연하게 존재시키기 위해 열중해온 것들을 버리고 나서도 남는 것이 자신의 본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돈과 명예, 지위와 권력의 기득권 등등을 빼버리고도 바로 그 자리에 여전히 따뜻한 인간이 남는다면 그야말로 진정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은 무엇보다도 그 사실을 내게 넌지시 알려주었다.


이영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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