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가치

| my story 2008.03.21 11:55
 

느림의 가치


빠르고 바쁘게 와글거리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시간에 쫒기고 일에 떠밀려 다니며, 지킬 기약도 없는 약속을 남발하며 산다.

함부로 사랑과 우정을  이야기 하고 쉽사리 이별을 거듭한다. 그래서 때로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뿌리 없는 삶에 습관처럼 익숙해져 간다.

빠름은 곧 현대사회의 미덕이자 새로운 세대에 편승하는 덕목이다. 따라서 계산이나, 판단하는 눈치도 빨라야 하며 상황에 따라 포기와 망각도 당연히 빨라야 한다.

도대체 느림이나 심사숙고, 양보와 기다림, 여유와 사유, 그리고 그 밖에 미련곰탱이 같은 것들을 껴안고는 사회생활 어디에서나 적응하고 발붙이기가 쉽지 않다.

모두가 어릴 때부터 빠름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느라 바쁘다. 그래서 말이 빠르고 글이 빠르며, 신체적 성장이 빠른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다른 집 아이들이 영재나 재능이란 수식어가 붙은 영어, 산수, 미술, 피아노, 태권도 등 빠른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굳게 믿어지는 것들을 배우느라 총력을 기울이데 그저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기만을 좋아하는 내 아이를 별 조바심 없이 지켜볼 부모는 갈수록 드물 수밖에 없다.

남들은 모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는데 별 초초함 없이 직장의 끝줄에 앉아 자신의 일만 파고드는 가장 또한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대를 앞서가거나, 혹은 최소한 뒤처지지는 않기 위해서 바쁜 일상을 받아들이며 성장하고 적응해 사회 속으로 편입되어 간다.

그 와중에 현실적으로 중요해 보이는 것들과 정신적으로 귀중한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그 가치혼란의 상실감의 정체가 바로 현대사회를 규정짓는 소외의 한 양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자아성찰의 신호음을 놓쳐버리고 예민한 감성을 회복하는 제동장치마저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폭주기관차처럼 일상의 한가운데로 눈만 뜨면 달려 나간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브레이크 걸린 인생의 길목에서 하얗게 마주치게 되는 공허함 속으로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유년의 순수와 박제되어버린 꿈들을 보고, 성취욕을 채우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했던 온갖 세속적 목표들에 밀려나 침묵했던 정신의 소리를 들으며 뒤늦은 후회를 하곤 한다.

일, 사랑, 정치, 약속, 다이어트, 아이들 교육...등등 가뜩이나 바빠 죽을 지경인데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느껴질 때, 그래서 그것을 잊으려고 더욱 서두르고 바빠져 내 삶에 남은 한 점 여유마저 떠내려가고 있을 때 오히려 우리 모두 느림의 미학에 눈 딱 감고 한 표를 던져 보지 않으려는가?


이영철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