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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포차]
30년 묵은 도루묵집, 중견 화가의 지난 날
<그린 꽃은 시들지 않는다>, 이영철 화백을 만나다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기에는 좀 늦고
그렇다고 일손을 놓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나의 오후 세시는 자주 그렇습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남산동 도루묵집으로 갑니다“
이영철 <그린 꽃은 시들지 않는다> 중
‘찡! 찡! 찡!’ 빈 놋그릇을 젓가락으로 세 번 두드리면 주방에서 아주머니가 나와 놋그릇을 들고 들어간다. 잠시 후면 그릇 가득 막걸리가 채워져 되돌아온다. 이영철 화백이 “일손 놓기 이른 시간” 찾는다는 남산동 도루묵집의 풍경이다. 1961년 서금란 할머니는 천원짜리 막걸리 한 사발을 시키면 서너 마리의 ‘도로메기’를 안주로 내놓았다. 세월이 흘러 도루묵이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는 귀한 몸이 되면서 지금은 7,000원에 8~10마리가 구워져 나오는 정식 메뉴가 되었다.
* 이영철 화백을 남문시장 안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30년 단골 도루묵집에서 전해 들은 어느 화가의 지난날
강의하던 교실로 풍겨오던 도로메기 구이 냄새
이영철 화백은 30년 전쯤, 대구로 와서 미술학원 강사로 일하던 시절 처음 ‘도로메기집’을 찾았다. 2층 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흘러드는 노릇노릇한 생선냄새가 이 화백을 끌었다. 외로운 타향살이에 그는 자주 도로메기집을 찾아 서금란 할머니가 구워주는 도로메기를 안주 삼아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세월이 흘러 도로메기집은 걸어서 2~3분 거리로 점포를 옮겨 ‘도루묵집’이 되었고, 서금란 할머니는 몇 년 전 돌아가시고 며느리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어느덧 중견 화가가 된 이 화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웃었다가 울고, 그림을 그리다가 글을 쓴다.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업실은 도루묵집에서 멀지 않은 대구 남문시장 안 상가 건물에 자리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재개발 소문이 나도는 상가 건물 2층 215호에서 화백은 봄을 그리고, 사랑을 그리고, 희망을 그린다. 화백을 처음 만나는 날에도 그는 손바닥에 초록빛 물감이 물든 채 남문시장 입구에 등장했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건넨 화백은 앞장서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반쯤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참치통조림에 코를 박고 이른 저녁을 먹고 있다. 인기척에 놀란 고양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자, “괜찮아, 먹어” 화백은 나긋한 목소리로 고양이가 편히 참치를 먹을 수 있도록 창문을 닫아주었다. 입구를 중심으로 ‘니은(ㄴ)’자를 옆으로 뒤집어 놓은 모양의 작업실은 2평 남짓한 작업공간과 또 그만큼의 서재로 꾸며져 있었다. 천장에 닿을 듯한 책장에는 문학과 미학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고, 군데군데 겉면에 여인이 그려진 종이가방이 걸려 있었다. 부인을 그린 거냐는 물음에 화백은 “글쎄요, 마음속에 있는 여인을 그린 거니까, 집사람도 닮아있죠”라고 대답했다.
기사에 쓸 사진을 찍고, 대강 작업실을 정리한 후 화백과 도루묵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놋그릇 가득 막걸리 두 잔이 나오고, 콩나물 무침과 잡어구이 몇 동이 준비되었다.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화백은 나직하게 자신의 지난날을 풀어냈다.
* 화백의 작업실 모습, 작업 중인 그림과 작업 도구(왼쪽), 책장 가득 문학과 미학 책이 꽂혀있고, 군데군데 여인이 그려진 종이가방이 걸려있다(오른쪽)
들꽃 가득한 오솔길, 들판과 숲에서 감성을 키우고,
형이 가져온 교과서 속 삽화에 반해
그의 고향 김천시 봉산면 신암 1리는 1600년의 역사를 가진 직지사가 자리한 황악산과 추풍령 사이에 야트막한 야산과 실개천을 끼고 있다. 그가 유년기를 보낸 60년대 그 곳은 다랑이식 논농사와 밀, 보리 등 밭농사가 전부였던 빈곤한 시골마을이었다. 어려서부터 이미지에 민감했던 그는 물 댄 논에 들어서는 일이 곤욕이었다. 두 다리에 들러붙어 피를 빠는 거머리가 수없이 상상되곤 했던 것이다. “농사일은 도저히 못하겠구나” 화백은 홀로 그렇게 생각했다. 대신 산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난 들꽃과 풀이 자란 오솔길, 들판과 숲은 오늘도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이 되었다.
한 살 터울의 형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화백은 처음 그림과 만나게 되었다. 형이 학교에서 받아온 교과서의 삽화를 처음 보는 순간 어린 마음이 ‘탁’하고 열리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그 길로 어머니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단지 자기 책을 가지고 싶다는 일념이었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학교에 보내달라는 화백을 기특하게 여겼다. “형은 학교 가기 싫어서 빼먹을 궁리를 하는데, 학교를 보내달라니까. 우리집에도 공부할 놈이 나는구나 하셨던거죠”
학교에 들어간 후 화백의 교과서는 빈 여백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그림으로 채워졌다. 교과서에 그려진 삽화를 빈 공간마다 베껴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실력도 출중해,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미술 실기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글쓰기에도 재능을 보였고, 백일장에서도 늘 상을 받아 나르기 바빴다. “글쓰기에 더 재능을 보이긴 했죠. 백일장에서는 늘 대상, 금상이었는데 그림은 은상, 동상 이랬거든”
하지만 시련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아버지는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배 곪기 좋은 ‘그림쟁이’의 삶을 좋아할 부모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처음 아버지에 반기를 들고 가출했다. 70리길 걸어서 같은 미술반으로 3년을 지냈던 친구집에서 들일과 집안일을 거들며 신세를 졌다. 한 달 여만에 가출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이후로 아버지와의 관계는 틀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했지만, 끝내 화해다운 화해를 하지 못한 게 지금도 한으로 남아있죠”
*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부탁에 붓을 든 이영철 화백
새까만 어둠 속 한 줄기 빛이 주는 절망... 아버지와의 이별
고등학교를 마치고 방황이 시작되었다. 중앙대 문창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입시 지원에 오류가 있었다. 인문대인 문창과에 예체능계로 지원한 것이다. 학교로부터 시험을 칠 수 없다고 통보받았다. 집을 나와 부산으로 내려갔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곳에서 그는 “거지처럼” 살았다. 달동네서 먹고 자며 글을 쓰던 시절 우연히 길을 걷던 중 조소 학원이 눈에 들어왔다. 학원 창문 너머로 보이던 조소를 본 순간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건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길로 부산 생활을 정리하고 대구로 올라왔다. 미술학원 강사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생활이 시작됐다.
스물다섯이 되던 해 뒤늦게 대학 시험을 준비했다.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로 있던 고향 선배가 시험을 쳐보라고 권유했다. 면접보러 가는 날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면접관으로 나온 교수들은 “아버지는 뭐하시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학비 문제로 입학만 하고 학교를 나오지 않는 학생들이 많았다. “같은 점수대면 기왕이면 학비 문제없이 학교 다닐 수 있는 학생을 뽑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김천에서 철도공무원으로 잘 계시다는 대답을 하고 면접장을 나왔다. 같은 시각 아버지가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안동에서 버스를 타고 대구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은 건 ‘부친사망급내’ 여섯 글자의 전보였다. 그 길로 다시 동대구역에서 버스를 타고 김천으로 이동했고, 직지사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막차가 끊어진 직지사에서 고향집까지 20리길을 걷고 뛰어 새벽녘에야 고향마을에 당도했다.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그의 집만 밝은 불빛을 내보내고 있었다. “누가 짙은 어둠 속 한 줄기 빛이 희망을 말한다고 하던데, 저한텐 그 기억이 되돌릴 수 없는 절망으로 남아있어요”
지난 5월 6일 홀로 남으셨던 어머니마저 그의 품에서 조용히 삶을 마치면서 그는 이제 세상에 혼자 남은 “고아”가 되었다. 어머니를 간호하며 미동도 하지 못하고 하얀 벽만 바라보는 어머니를 위해 매일 수차례 그림을 그려 걸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그때처럼 내가 그림을 그리길 잘했다고 느낀 적이 없어요”
그린 꽃은 시들지 않는다
젊은시절의 기억들 때문인지, 이 화백의 초기 작품은 인간의 존재, 생성과 소멸, 죽음 등 무겁고 어두운 소재들이 주를 이루었다. 표현 방식도 지금처럼 밝은 색감이 아닌 어두운 색감의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했다. “당시에만 해도 예술은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작품 활동도 그렇게 이뤄졌던 거구요”
16년전 어머니가 병상에 누울 무렵 화백의 그림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봄, 희망과 사랑 등 밝고 힘찬 느낌의 작품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느낀 건 이 나이의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꿈과 희망,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그것들이 없어진 건 아니죠. 여전히 그들 마음속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지만 드러나고 있지 못할 뿐인 거죠”
<그린 꽃은 시들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도 앞서 밝힌 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내 감성의 창은 늘 슬프고 나약한 것들에게로만 열려 있었다. 대의나 명분, 역사나 우주처럼 깊고 큰 것이 아니라 작고 여린 것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림으로 그린 꽃이 시들지 않는 것처럼 유년의 감성과 꿈은 시들지 않은 채 여전히 가슴속에 살아 있다는 화백의 수줍은 고백이다. “이젠 살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사회적인 의식을 담기도 하지만 밝은 희망을 함께 담아 낼 수 있는 그런 그림”
인터뷰를 마칠 즈음 화백의 벗들이 도루묵집에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쉰을 넘긴 화백은 친구의 손을 꽉 잡은 채 막걸리 잔을 두드렸다.
“내 작업이 여전히 고단하고 강파른 현실을 반영해야 하는 예술가의 시대적,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다면 작지만 양지바른 텃밭을 일구는 심정으로 기꺼이 그 짐을 질 것이다” <그린 꽃은 시들지 않는다> 중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