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의 의미
세상은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특히 디지털 패러다임으로 정의되는 현대사회는 현실공간의 낮과 밤은 물론이고 가상공간에도 빈틈없이 이미지들이 침투해 있다.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이시대의 현란한 볼거리들은 온갖 색채와 형태의 경연장이다. 광고와 패션, 수많은 산업제품들, 영상미디어매체들, 심지어 음식물을 포함한 세상 모든 곳에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인간은 그 모든 것들을 주로 시각적 감각에 의존해서 본다. 그렇게 본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그 정보를 근거로 세상과 소통한다.
그러나 눈으로 본 것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믿을 만한 것일까?
그렇다면 눈속임의 대표적인 경우에 속하는 영화의 컴퓨터 그래픽이나 착시효과, 마술의 거짓 정보에 매료되는 것은 왜일까? 또한 연주회장등에서 몰입이 필요한 중요한 순간에는 더 잘 보고 느끼려고 두 눈을 부릅뜨지 않고 오히려 눈을 감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아가 만져본다, 맛본다, 들어본다, 맡아본다 등 다른 감각의 느낌을 표현할 때도 왜 똑같이 <본다>고 표현하는 것일까?
시각이란 사물을 인식하는 비중이 높을 뿐이지 사실 알고 보면 절대적이고 유일하게 보는 수단이 아닌 매우 불안정한 감각이다.
잘 보느냐 하는 문제는 잘 느끼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보는 것에 의미를 느끼지 않는 시력이 좋은 사람보다는 이미지에 민감한 시력이 나쁜 사람에게 세상과 사물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곧 무엇을 보려하느냐 하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사실 우리는 지금 눈앞에 전개되는 이미지조차 온전하게 바라볼 수도 없다.
바로 눈앞에 있는 TV를 볼 때는 그 주변을 볼 수가 없고, 주변에 집중하려면 TV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보는 일에 민감한 화가들조차 모델을 관찰할 때는 화면을 볼 수가 없고, 그림을 그리려고 화면을 볼 때는 정작 모델을 볼 수가 없다. 결국 인간은 그 시간이 길든 짧든 기억에 의존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판단하겠다는 의지는 이미 상당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어디 그 뿐인가?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심리상태, 직업, 경험, 기호 등에 따라서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여 진다. 한 송이의 예쁜 장미 속에서 농부는 품종을, 화훼업자는 가치를, 연인은 사랑을, 화가는 미적요소를, 시인은 우주의 비밀을 보지 않던가 !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잘 볼 수 있을까?
그러자면 일단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내 마음 속에 이미 내가 보려고 하는 세상을 정해버리면 결코 세상을 진실 되게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늘 미리 결론을 가지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세상만물이 말 걸어오는 모습 그대로 일단 받아들인 후 내가 보려는 부분과 절충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늘 답은 하나이고 내 사고와 경험의 출력물만이 정답이라는 생각보다는 모든 일에 답은 여러 가지이고 내 답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
세상은 늘 상대적으로 반응하고 교감하며 소통하게 디자인되어 있는 곳이다. 어둠이 있어야 밝음을 설명하기 쉽고, 부드러움과 강함, 남녀, 노소 등 모든 것이 단일 개체일 때 보다는 상호 복합적일 때 서로간의 정체성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서두르지 말고 느리게 기다릴 줄 알아야 잘 보인다.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보면 그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최단시간, 최단코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 와중에 느리고 섬세한 아름다움은 흔적도 없이 흩어지고 만다. 현대 도시문명사회가 목적만을 추구하다 얼마나 많은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을 잃어버렸는지는 최근 열병처럼 번지는 웰빙 바람 속에서도 충분히 감지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표면적인 것에 가려진 신의 암호를 해독해보려는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 사물은 자신을 보려는 상대방의 의지에 비례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을 보려는 태도는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한 순간에도 수많은 창조의 진리를 이해하고 거대한 아름다움과 조우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일생동안 죽순처럼 돋아나는 목적들에 끌려 다니느라 스스로가 정해놓은 허상만 보다가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소멸해가기도 한다. 행복과 불행, 삶의 성공과 실패는 물질적 가치의 성취도 이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 오감을 통해 무엇을 얼마나 진실 되고 풍요롭게 보고 느끼며 살았느냐에 더 큰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잘 보는 것이야 말로 잘 사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가파른 인생의 언덕을 정신없이 넘어가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이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며 살고 있나 반문해볼 일이다.
이영철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