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의 미학

| my story 2008.03.21 13:47
 

오름의 미학


어린아이를 키우다 보면 느닷없이 새로운 행동 양식을 보일 때 부모가 느끼는 경외감은 대단하다.

그리고 그 중 특히 놀랍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갑자기 의자나 소파, 책상 등에 기어오르기 시작할 때다. 물론 그 모습 속에 지난날의 자신을 오버랩 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처럼 앉거나 일어설 힘이 생기면서 출발되는 높은 곳을 향한 집요한 기어오르기는 성장에 비례해 점점 그 고도를 높여간다. 나 또한 장롱 위에 정신없이 올라가 내려오지 못하고 운 기억, 부친이 걸쳐놓은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 고함지르던 기억, 감나무에 올라가다 떨어져 크게 다친 기억 등, 만만찮은 오름의 후유증을 누구 못지않게 간직하고 있다.

인간은 이처럼 왜 태어나면서 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오르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단지 앙시()의 일상에서 부감(俯瞰)에로의 시점 이동에 의한 하이앵글의 컷에 담긴, 더 이상의 연출이 필요없는 미장센의 신선한 미적 파노라마 때문일까? 아니면 신의 영역을 넘보며 인본주의의 세계관을 구현한 고대 바벨로니아인 니므롯의 디옥시리보 핵산 강 줄기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의 혈관 속을 흘러가고 있기 때문일까?

내가 높은 곳에 올라 설 때마다 느끼던 아주 고해상도의 감동을 비춰보면 로우앵글과 하이앵글의 미적 쾌감 차이 속에는 바로 신을 닮으려는 인간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는데 동의하는 편이다.

돌이켜 보면 나도 주변의 높고 낮은 산뿐만 아니라 명예나 물욕, 탐심이 포함된 칠정(七情)의 거대한 산들을 참 부지런하게 올라왔던 것 같다. 특히 물리적 고도와는 달리 정신의 지도 위에 솟은 탐욕의 산들은 때때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는 산행을 재촉해 무적 고통스러웠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들과는 현재 진행형으로 나와 불편한 동행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 물리학적 고찰이든 아니든 간에 높은 곳에 오를수록 내가 느낀 것은 정복과 성취의 희열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찰나의 들뜸이 가라앉고 나면, 모든 높은 곳은 오르면 오를수록 세상이 점점 넓고 크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 만큼 세상이 바라보는 나는 거기에 반비례해 작아진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근법의 기초 개념이었다.

그래서 힐러리경이 운명의 그 날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거대한 우주를 머리에 이고 느꼈을 가장 솔직한 감정은 한없이 작디작은 인간 존재의 겸허함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한다.

낮은 곳일수록 내가 커 보이고 나만 보이고, 높은 곳에 오를수록 존재 의미가 미미해짐은 장자의 대붕과 쓰르라미의 비유에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웬 일인지 인간 사회는 높은 곳에 오를수록 오만에 젖어 세상을 내려다 보려고만 하지 정작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안과 밖이라는 쌍 개념을 통해 겸손의 지혜와 자각의 통찰에 이르지 못할수록 본인 자신은 물론, 그의 시야에 비치는 모든 것들에게도 고통과 불행의 비를 뿌린다는 것을 또한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성장·소멸의 과정을 빈틈없이 거쳐간다.

그 과정에서 빠르고 느림이나 높고 낮음은 무의미한 집착일 수도 있다.

하루살이의 삶과, 거대한 바위산이 결국 모래 먼지로 흩어지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수많은 종교나 철학, 과학이 앞 다투어 설명하고 있다.

세상과 나와의 관계는 내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성취하고 소유한다는 측면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이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화합하고 나누다 때가 되면 흩어지는 것이라 했다.

가끔 지금 내가 서 있는 지점을 새삼 찬찬히 둘러 볼 일이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 본 후, 내가 얼마만큼 작아진 지점까지 올라왔는지 또한 얼마나 더 오르고 작아져야 참다운 나를 만나게 되는지를 한번 쯤 사유해 봄이 어떨까...


이영철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