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와 포플러
화가가 되겠다고 규격화된 삶으로부터 비켜서서 몸과 마음이 가는대로 떠돌던 시절 만난 사람이 L선배였다.
15년 가까이 연배인데다 전문 엘리트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이미 성공한 그는 여러모로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한 내게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고, 나 또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 심성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L선배는 매사 쾌활하고 스케일이 컸으며 다방면에 해박한 편이어서 사소한 것들에도 크게 고민하던 나와는 많이 달랐다. 물론 바로 그 반대 성향이야말로 서로의 관계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갑각류로 분류되던 나의 사고방식이 상당히 유연해진 이유 가운데 그 선배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당시 어느 해 가을 선배의 장거리 출장길에 우연히 동행했을 때 생긴 일이다.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국도 변에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가을 향기를 잔뜩 머금은 채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감동이 전염되었는지 선배가 외쳤다.
< 와! 대단해..포플러가 장관이지? >
당연히 농담으로 받아들인 나가 플라타너스가 아니냐며 웃어주자 L선배는 뜻밖에도 단호하게 반응해왔다.
< 아니 이사람..포플러도 몰라? 이게 일명 버즘나무라고 하는 그 포플러잖아! >
우리나라에서 너무도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들로 쌍떡잎식물 장미목 버즘나무과 플라타너스속의 플라타너스와 버드나무목 버드나무과 사시나무속의 포플러에 대한 최초의 입력에 착오가 생긴 듯 했다, 그는 그 오류를 그대로 껴안고 중년을 넘어서고 있었고 어쩌면 평생 그렇게 믿고 살아갈 것이 분명했지만 그때 나는 나이와 사회적 지위에서 아니 그 무엇보다도 그의 강력한 확신에 완전 제압되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만 우리가 보고 느끼는 현상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최소한 사람들의 외형적인 삶에는 전혀 불편함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다소 혼란스러웠으며, 어쩌면 우리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의 상당부분에 커다란 함정이 내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이 서늘했다.
그 날 이후 지금까지도 그 기억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나의 가슴 속에 남아 어쩌면 오늘도 내가 확신에 차 이야기하고 있는 수많은 포플러들이 혹시나 플라타너스가 아닌지 습관처럼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다.
이영철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