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묵 타임
하루 일과를 정리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그렇다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늦은 시간이 가끔 있다. 나의 오후 세 시가 그렇다. 이른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해 점심까지 거르고 나면 갑자기 모든 기운이 빠져버리는 것도 이 무렵이다. 게다가 이제 곧 또 하루가 떠나간다는 생각 때문에 슬슬 마음까지 불안정해진다.
이런 날 화실 밖을 내다보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분다. 결국 나는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화첩과 펜을 챙긴 후 서둘러 화실을 나선다. 작은 사거리 하나 건너 골목을 두 번 꺾어 돌아 놋 대포 잔술집에 가기 위해서다. 이곳에는 안주로 도루묵이 촉촉하게 구워져 나온다. 한나절 허기진 육신과 설레는 마음이 화해를 하는 도루묵 타임은 그렇게 시작된다. 천 원짜리 놋 대포 두세 잔을 쉬지 않고 들이키고 나면 정말이지 낮술의 축복을 실감하게 된다. 익은 술의 무게에 눌려 고개 숙이면 희뿌연 탁주잔 속에 섬이 되어 둥둥 떠다니는 내가 보인다. 취했나 싶어 고개를 들면 출입문 위 낡은 환풍기가 오른쪽으로 두어 바퀴, 왼쪽으로 반 바퀴 느릿느릿 졸고 있다. 저나 나나 오락가락 하는 것이 참 아름답다. 마침내 환풍기에 칭칭 감겨있던 시간의 줄자가 풀려나와 내 마음 깊이 밀고 들어온다. 늘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줄자를 타고 출렁거린다.
이제 화첩을 펼칠 시간이다. 탁주 집 빛바랜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그냥 선이 가자는 대로 따라나서면 주로 얼굴이 그려진다. 어떤 얼굴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아서 자꾸 그린다. 또 어떤 모습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잊혀지지 않아서 거듭 그린다. 취기가 오를수록 펜을 쥔 손은 화첩 위에서 불같이 춤을 추고 나는 마치 구경꾼처럼 그것을 지켜본다.
이렇게 내 의식의 심연에 남아 있다가 다시 고개를 내민 얼굴들은 대체로 눈빛이 젖어 있거나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래서인지 슬픔을 모르는 얼굴과 희망이 없는 얼굴을 그린 기억이 별로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 만나는 사람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별하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 그리움도 줄어들고 주량도 따라서 준다. 슬픈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술을 끊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사람을 끊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행복과 예술의 향기는 아예 넘치거나 턱없이 부족한 잔술집 놋 대포 속에도 있다. 다만 우리는 더 채우겠다고 앞만 바라보며 거리를 헤매느라 이 허름하지만 따뜻한 곳을 잘 발견하지 못한다. 도루묵집 낮술 속에는 늘 사람과 시간이 얼싸안고 낮고 느린 곳으로 흘러간다. 오늘도 정성을 다해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화가 이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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